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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 Apr 21. 2022

나는야 슈퍼 고양이

길 건너 골목길 모퉁이에는

저만 알고 있는 최고 명당 슈퍼가 있어요

할로겐 조명이 냉장고를 비추는 곳

장판이 허술하게 호치케스로 찍혀 있는 평상은

만남의 장소로 적격이죠

퇴근 후 장을 보고 들어가는 직장인이

잠시 앉아서 쉬어 가는 곳

미취학 아동들이 줄넘기를 하러 나왔다가

아이스크림 하나씩 손에 쥐고

기분 좋은 웃음을 남기고 가는 곳

목요일인 오늘은

옆집 열쇠 가게 KFC 할아버지와

앞집 도장 가게 트로트 아저씨,

길 건너 정육점 하시는 지우 아빠가 모이는 날이에요

보슬비 살짝 내리는 8월의 후덥지근한 날

짭조름하면서 나른한 더운 열기가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날에는

파전에 막걸리를 먹어요

조금만 달라고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가 보지만

떡고물 하나도 제대로 얻지 못했어요

슈퍼 사장 뽀글이 아주머니가

우유랑 참치캔을 챙겨줘서 기분이 풀렸지요


장마의 계절이 쏜 화살같이 지나가고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골 슈퍼로 향했죠

위풍당당하게 도착한 슈퍼에는

양복쟁이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어요

다리가 얼마나 첩첩산중 벽을 치고 있는지

사람들은 자기 할 말들을 해대며 소리를 질러요

저는 참치를 얻지 못하고 체념하고 돌아섰어요


며칠이 흐른 후

다시 슈퍼로 향했어요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달랐어요

할로겐 조명이 비춰야 할 곳에

철문이 내려져 있고 빨간 스프레이로

글자들이 중구난방 적혀 있었어요

ㅊ...ㅓ..ㄹ.. 거

그래요

'철거'라고 적혀 있었어요

'철거'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저는

한참을 가게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섰어요


한 달이 지난 후

소식이 궁금해진 전

하릴없이 그곳으로 향했어요

슈퍼는 온데간데없고 흙만 있었어요

우리의 추억이 물들어 있는 평상은 어디로 간 건지

저는 끝끝내 알 수 없었어요

뽀글이 아주머니 따뜻한 쓰다듬의 행방도

파전에 막걸리를 즐기던 삼총사의 안부도

기분 좋게 만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의 기억도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직장인 작은 쉼의 샘터도


일 년이 지난 후

그곳에는 건물이 들어섰어요

할로겐 조명이 냉장고를 지키고

평상 위에서 가르랑대던 추억은 유물이 되었어요


그날 저는

따뜻하게 데워진 자동차 아래에서 잠을 청하며

행복한 꿈을 꿨어요


슈퍼 사장 뽀글이 아주머니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줬고요

목요일 모이던 삼총사 중 KFC 할아버지가

웬일인지 참치캔을 따서 저를 챙겨줬어요

아이스크림 먹던 웃음기 많은 아이들은

저를 한 번씩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장을 보고 집으로 가던 피곤한 직장인은

주섬주섬 간식을 꺼내 저에게 웃어 보였어요


그래요

저는 사랑받는 슈퍼 고양이입니다



0421 번호판 차주는 차를 빼다가 깜짝 놀랐다. 바닥에 고양이 사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 8시 29분. 안 그래도 출근하던 차에 마음이 바쁘던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양이 꼬리를 들어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넣었다.

  "아 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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