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이야기(마지막)
현대 체스에서 백색은 여전히 먼저 움직인다
그러나 왕권이 사라졌다고 해서 체스판 위의 백색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백색은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과거와 달리 윤리적 의미가 아닌, 단순한 게임의 규칙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실, 체스에서 백색이 먼저 움직이는 규칙이 공식화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이전까지는 반드시 백색이 선공할 필요가 없었고, 가끔은 흑색이 먼저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체스 이론가들이 **“먼저 움직이는 쪽이 유리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백색이 선공하는 규칙이 정착되었다.
이제 체스의 색상은 더 이상 문명과 야만의 대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백색을 둔다고 해서 정의를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흑색을 둔다고 해서 혼돈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백색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우리가 과거의 유산을 무의식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체스판 위에서 역사를 바라보다
체스는 작은 게임판이지만, 그 속에는 거대한 역사가 담겨 있다. 백색이 선공하는 규칙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기독교 문명, 왕권, 전쟁, 혁명 등의 요소가 얽힌 결과물이었다. 과거의 군주들은 체스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했고, 혁명가들은 체스를 통해 기존 질서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체스를 그저 게임으로만 바라본다. 흑과 백의 의미는 사라졌고, 전략과 승리만이 중요해졌다. 과거처럼 왕이 신성한 존재도 아니며, 흑백의 싸움이 곧 문명과 야만의 싸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스를 둘 때마다 나는 여전히 한 가지를 의문으로 남긴다. 우리는 정말로 백색과 흑색의 의미를 잊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체스판을 펼치고 다시 게임을 시작한다. 백색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 게임의 승자는 정해져 있지 않다.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한 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