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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샛별 Jun 24. 2020

출판 1주년을 기념하며

#잔이비었는데요 #별일있지


    그 어떤 날짜와 이벤트보다 진하게 밀도 있게 채워진 만 1년이었다. 학생 때부터 꿈의 목록에 빠지지 않았던 '내 이름으로 책 출판하기'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매년 나의 '올해의 목표'에 올랐다. 어느 시점엔 당장 출판을 목표로 하는 대신에 그 해에 단편 소설이라도 한 편 완성하기를 바라며 목표를 수정하기도 했다. 어쩌면 누구도 엿볼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조차 타협을 거듭해왔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다이어리를 처음 펼치고 나 스스로 써넣으면서도 이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불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록에서는 뺄 수 없는 간절한 바람 사이를 넘나들며 꿈은 굳어져갔다. 단단함이 아니라 너무 오래되어 굳어져버린, 하지만 마중물로 꿈을 부드럽게 만드는 노력을 하는 대신에 애써 못 본 척 지나치는 날들이었다.


    2019년 새해 목표를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출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만의 콘텐츠로 출판을 경험한 지인을 통해 기획출판과 자비출판에 대해서도 들은 적 있지만, 독립출판은 처음 들어보는 방식이었다. 당시엔 독립서점도 방문해 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책들이 출판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큰 고민을 하지 않고 2019년의 목표 하나를 지우고 그 자리에 썼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랐던 꿈이 내게 굴러오는데 피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독립출판 하기'. 조주기능사 취득을 지우고 그 위에 쓴 목표, 나의 오랜 꿈이 상반기를 넘기기도 전에 이루어질 줄은 그때는 몰랐다.


    3월부터 4주 과정의 주말 독립출판 클래스를 들으며 그동안 쓴 글을 모아 만들 나의 첫 번째 책을 기획했다. 처음 생각한 것과는 달라졌지만, 나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고 내가 가장 할 이야기가 많은 '술'이 테마가 되었다. 노트에, PC에, SNS 피드에 흩어진 글을 모으면서 부족한 글을 채우는 일과 편집, 디자인을 오롯이 혼자 해내는 일은 힘들었지만,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단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바쁜 회사 업무와 병행하려면 시간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평일에는 야근 후에 집에서 편집하는 것이, 주말에는 온종일 글을 쓰거나 편집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술을 테마로 하는 책을 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좀처럼 술을 마실 수 없는 날들이었다. 다만 때때로 내가 쓴 글의 표현이 정확한지 확인하려고 그 술을 꺼내 마시는 날이 있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

    업무가 한참 바빴던 6월 초, 나의 첫 번째 책 <잔이 비었는데요>가 나왔다. 박스에 담긴 새파란 책들과, 포장용 비닐, 개별 배송을 위한 안전봉투가 방구석에 쌓였다. 가내 공장처럼 책을 포장하고, 여러 서점에 책을 배송하며 바쁜 몇 주가 지났다. 6월 말에는 독립출판 클래스 때부터 많은 도움을 준 독립서점에서 감사하게도 서울 국제도서전에 책을 진열해주셨고, 7월 초에는 2쇄를 진행하게 됐다. 자비출판으로라도 갖고 싶었던 내 이름을 건 책이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지고 사랑받는 것을 보는 일은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때때로 인스타그램에서 내 책을 찍어 올리는 것을 발견할 때면, 그 부분이 내가 특히 마음을 썼던 페이지일 때면 본인의 작품을 '자식'에 비유했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잠시라도 생각해 볼 시간을 빌릴 수 있었다면 충분히 만족한다. 

    

꿈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

    책을 출판하고 기존에 경험한 적 없는 즐거움을 느끼던 어느 날 문득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를 아는 지인들은 물론, 책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파티를 열고 싶다는 것. 마냥 생각만 하기에는 너무 아쉬웠고 오랫동안 간직만 하던 꿈을 이루고 생긴 자신감 때문일까, 일찌감치 주위에 알리기 시작했다. 

    책을 만들던 봄, 세상에 나온 책을 알리고 유통하던 여름, 그리고 안정기에 접어들며 파티를 준비하던 가을에 이르기까지도 회사 업무는 항상 바빴다. 퇴근 후에 파티 메뉴를 구상하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거나 직접 만들면서 항상 힘들었던 가을을 즐거운 고민으로 채웠다. 


    11월 말, 겨울을 앞둔 주말에 첫 파티를 열었다.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가 책인 만큼, 책과 같은 디자인으로 별도의 메뉴판도 인쇄해 테이블마다 비치했다. 칵테일을 위해 준비한 보드카와 진에서부터 각종 와인, 집에서 끓여온 뱅쇼, 우리에게 친한 술 소주와 맥주까지 늘어놓으니 마치 책의 페이지들을 펼쳐둔 것 같았다. 술이며 안주며 아쉬움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넉넉히 준비했는데, 참가비가 따로 있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술이나 간식을 가져오는 바람에 정말 풍성해졌다. 오랜 친구들이나 동료들, 새로 사귄 지인들은 물론이고 책을 통해 인사한 분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서 축하의 말과 함께 서로를 알아가며 '한잔'을 함께 기울였다.


새로운 칵테일,

    파티의 호스트로 사람들과 인사하며 이야기 나누다 보니, 혀 끝에 닿는 술의 감각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맛있다며 감탄했던 와인의 향과 맛도, 쌓였던 술병들이 비워지듯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곳곳의 공간에서 새로운 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말, 멀리서 귓가를 스쳐 지나는 내 이름은 또렷하게 들려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를 체감하게 했다.


    파티가 끝나갈 즈음, 잠시 파티 공간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각 테이블에 모인 이들을 돌아봤다. 안에 담은 술들의 무게와 달리 얇고 가벼운 책 한 권을 토대로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는 게 신기했다. 가장 마음에 들던 한쪽 벽에는 대관한 그 공간의 이름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     ]. 위치나 규모도 좋았지만 '블랭크'가 있어서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도록 비어있던 그 공간을 많은 사람들이 섞여 채웠다. 오늘 파티는 그 자체로 한 잔의 칵테일 같기도 했다. 이 칵테일의 색은 한쪽 벽과 책 표지를 가득 채운 푸른빛이 아닐까. 낯선 이들끼리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내가 어리석다는 듯 소란한 이들 덕분에, 또 다른 색과 향을 지닌 새로운 칵테일을 꿈꾸게 했다. 


    2020년, 올해의 목표에는 다음 책을 출판하는 것과 함께 작년에 미뤄두었던 조주기능사 취득이 있다. 일찌감치 필기시험을 치고, 코로나 19를 핑계로 실기 준비를 멈춘 상태지만 다음 파티에서는 꼭 작가이자 바텐더로 사람들과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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