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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샛별 Jun 25. 2020

서른다섯에 듣는 '서른 즈음에'

    퇴사 축하파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작위로 돌아가던 플레이리스트에서 故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온다. 마침 버스는 다리 위에 진입해 오른쪽으로 한강 전망카페를 지나 보낸다. 수면에 비쳐 흐릿하게 넘실거리는 주황색 조명이 노래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서른 즈음에'를 콕 찍어 듣게 된 것은 스물여덟 정도부터였다. 대학생 때는 까마득한 어른 같았던 '서른'에 가까워지면서 이 노래를 듣는 것은 마치 매년 당연한 의례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서른하나... 그 지점에 가까워지고 또 멀어져 갈 때 항상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나는 이 멜로디가 귀를 파고들곤 했다. 

 

    스물넷에 처음 직장인이 되었을 때, 내 힘으로 독립했을 때, 서른이 되던 해에도 이제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직 많이 어렸다. 오늘도 이후의 내가 다시 돌이켜본다면 아직 어리기만 할 어떤 날이겠지. 이 노래는 마치 청년시절을 관통하는 하나의 노래인 것 같기도 하다. 생택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고들 하는데 내겐 이 노래도 그런 느낌이다. 오래된 구옥 벽지에 남아있는 어린애들의 키재기 낙서 같기도 하다. 이미 별이 된 가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서른 즈음에 머물러 있지만 나는 어느새 30대의 한가운데, 더 이상 나이 들지 않는 그보다 이제 더 많은 나이가 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는 순식간에 한강을 건너 늦은 밤이라 한산한 도로를 달린다.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가사를 더듬거리듯 느끼며 듣다가 문득 어른이 된다는 건 잃어버리는 것과 떠나보내는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인과의 이별도, 지금 앞둔 퇴사처럼 회사나 동료와의 헤어짐도 처음만큼은 어렵지 않다. 어린 시절에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전학이 가장 먼 이별이었다면, 서른 즈음을 넘어서며 영영 만날 수 없는 헤어짐도 찾아온다. 어제의, 지난달의, 작년의 나 자신도 때때로 한동안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있지 않던가. 노래가 끝날 무렵 반복 재생을 누르고 도로로 눈을 돌리며, 분명 내 안에 있었던 열정이 넘쳤던 서른 즈음의 나는 어디쯤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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