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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샛별 Apr 04. 2021

다른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사람

<오만과 편견>을 읽고

지금 읽어야 할 이유


    얼마 전 책장에 한동안 꽂혀있던 <오만과 편견>을 꺼내 읽었다. 책장 중 고전들을 모아놓은 칸이 있는데, 여러 차례 읽었거나 읽고 싶은 책들이 모여있다. <오만과 편견>은 그중에서도 몇 없는 '제대로 완독 하지 않은 책'이었다. 김영하 작가가 인스타그램에서 하고 있는 #김영하북클럽 3월의 책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었다. 좋아하는 작가라 같은 책을 읽고 라이브로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1월, 2월의 책은 읽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미 책장에 있는 책이기도 했고, 김영하 작가가 책을 추천하며 했던 '이번이 아니면 평생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날 조바심 나게 했다. 


    초반부를 읽다 보니 분명, 읽으려고 시도했던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결말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 걸 보니 이전에는 분명 중간에 포기했다는 확신도 함께.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도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포스터는 확실히 기억이 났다. 좋아하는 배우인 키이라 나이틀리의 표정까지도. 영상보다 텍스트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원작이 있는 영화라면, 원작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보지 않으려 한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그 상상의 세계와 이미지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인데, 영화를 먼저 보면 원작을 읽으면서 만드는 나만의 세계가 스크린 속 장면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번에 <오만과 편견>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포스터 하나 만으로도 인물에 대한 외형적 이미지가 내 안에서 굳어진 점은 아쉬웠다. 



사람을 통해 성장한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 시대의 생각들이 깔려있기에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을 것 같다. 고전 작품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듯이. 2021년 3월의 나는 <오만과 편견>을 너무 이른 시대에 태어난 엘리자베스의 성장으로 보았다. 그녀는 늘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 느꼈던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하고 새로운 눈을 뜨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그 과정에는 늘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있다. 다시와의 만남, 친구였던 샬럿의 선택을 통해 발견한 새로운 면, 위컴이나 그 외의 많은 인물들.. 

    우리는 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가고, 또 그렇게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소설 속의 세계나 내가 사는 현실이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 각각의 선택과 생각도 함께 조망하고 있지만 내게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더 의미 있게 보였다. 아마 그녀에게 가장 공감할 수 있어서겠지만. #김영하북클럽  태그와 함께 올라온 다른 이들의 후기를 보면서 같은 소설을 각자 서로 다르게 읽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의 책 외에는 접점이 없는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하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3월 마지막 날 밤 진행된 라이브에서는 더 다양한 의견들을 댓글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발견하지 못한 인물의 생각과 장면을 미래의 나는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만과 편견>의 인물들

    결혼하지 못한 자식이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그 결혼조차 지참금 운운하며 평가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해보면 엘리자베스처럼 유머러스한 대응이 가능했을까 의문스러웠다. 콜린스 씨의 청혼과 이를 거절하는 장면이 그 시대를 정말 잘 보여줬다. 호의를 베풀듯 베넷 가에서 신붓감을 '고른' 콜린스는 엘리자베스가 청혼을 거절하자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자들이 거절하는 건 관습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의 청혼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이성적인 존재'로 봐달라고 재차 이야기하지만 소용없다. 꼭 이 장면뿐만 아니라 소설 내내 내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콜린스였지만, 이런 말들이 제인 오스틴의 시대에만 머물러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더 화나게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행동은 최소한 우아한 여성의 가식이나 교태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라며 아버지께 거절을 부탁하려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건 바로 베넷씨였다. 다시(다아시)씨보다 오히려 아버지가 엘리자베스가 행복을 찾는데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베넷씨가 없었더라면 과연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성장하면서 자신의 삶을 채웠을까 의문이다. 완전히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딸들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엄마 옆에서,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아버지의 존재가 더 커 보였다. (물론 베넷씨도 일부 세상의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서재라는 그의 공간은 시대의 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도피처로 느껴지기도 했다. 서재에 들어가 책을 여는 것으로 시끄러운 세상 밖으로 향하는 문을 닫은 게 아닐까. 최근에 내가 서재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어서 더 꽂혔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가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하겠다고 할 때, 베넷씨는 오히려 '네가 콜린스 씨와 결혼하겠다면 난 너를 평생 보지 않겠다'며 그녀의 선택을 지지한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다시 씨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자발적인 의사가 맞는지 우려했고, 재차 확인한 뒤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베넷씨가 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장면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가문 입장에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할 다시 씨의 청혼에도 그녀의 의사를 묻는 게 인상 깊었다. 자신이 아닌 당사자의 행복을 우선에 두고 바라본다는 것이 느껴져서다. 


    항상 처음부터 옳은 판단을 할 수는 없다. 과녁을 겨눌 때 영점 조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틀어진 판단을 바로잡으려면 많은 새로운 경험과 관점이 필요하다. 과거의 내가 갇혀있던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시각이나 전환점이 필요한 것처럼. 엘리자베스가 다시 씨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여행이었던 것도 그래서 의미 있게 보였다. 시간은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지 않은가. 공간만큼 쉽게 사고의 흐름을 바꾸는 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내 생각이나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다 보면 많은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일상 속에서 내가 하고 있던 생각들이 정말 맞는지, 이게 최선인지. 내 삶도 여행지에서 전환점을 맞거나, 생각을 더 단단하게 하는 쉼표가 된 적이 많았다. 





오만, 그리고 편견에서 벗어나는 일 


    소설의 제목인 '오만' 그리고 '편견'을 빼고 책에 대한 느낌을 적어보라는 제안을 북클럽 호스트인 김영하 작가가 던졌었다. 그 두 가지로부터 멀어지려면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계속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베넷 씨처럼 내 선택을 응원하는 지지자가 옆에 있다면 좋겠다. 사회가 만드는 부자유, 때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강요하는 선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그래도 된다'라고 말해주는 사람. 또는 스스로 그 증거가 되어 '그래도 괜찮다'라고 보여주는 사람. 

    내게 가장 든든한 베넷씨는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부모님도 나를 많이 지지해주었지만. 나는 이제 내게 끊임없이 보내는 믿음과 지지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도 든든한 응원군이나 증인이 되고 싶다. 엘리자베스의 삶을 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쩌면 본인보다 베넷씨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든든한 지지자가 된다면 나도 그런 행복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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