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결산 #올해의책 #올해의영화
10년 이상 매년 연말이면 한 해를 정리하며 나만의 어워즈처럼 올해의 OOO을 고르고 있다. 2020년부터는 브런치로도 공유하고 있는데, 지난해 연말에는 놓치고 지나갔음을 이번에 깨달았다. 그래도 다시 한번 반복해 본다. 가장 긴 일상의 루틴 중 하나가 연말결산이니까. 친구와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에서도 최근에 '연말결산'을 다뤘다. 내가 연말결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녹음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고민해 봤는데, 나는 새로운 한 해를 더 잘 살아내고 또 지난 한 해를 잘 기억하기 위해서 연말결산을 한다고 스스로 답했다.
일정 기간을 돌아보면서 마무리하고 보내는 것. 올해 참 게으르게 브런치에 글을 썼지만, 그나마 최근에 (6월 말이지만..) 올린 회고에 대한 글과도 접점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읽은 책을 모두 노션으로 기록하고 있다. 카테고리와 함께 나만의 별점을 매기고 최근에는 짤막한 한줄평도 추가했다. 누군가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읽은 지 오래된 책들의 경우 추천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다. 그래서 이제 나만의 연말 시상식을 할 때 책 부문의 선정은 한결 수월하다. 평점이 높은 순서로 살펴보며 고민하면 된다. 2023년에는 50권을 조금 넘는 책을 읽었고, 그중에서 별 5개를 받은 책은 딱 두 권이었다. 팟캐스트에서는 한 권만 선정해서 발표했지만, 여기에는 두 권을 모두 공개한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 최인아
'내 이름 석자가 브랜드다'라는 책 소개의 한 문장 때문에 바로 읽게 된 책이다. 브랜딩과 마케팅에 대한 책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 자신'을 어떻게 마케팅하고 브랜딩 할 것인가 고민하는 나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기도 했다. 제일기획 부사장까지 올랐던 광고인에서 일과 자리를 과감히 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선택이 내 기준에서는 저자의 가장 특별한 기록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연인의 삶을 충실히 즐기다가 다시 일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도, 그렇게 다시 찾은 두 번째 일이 '최인아 책방'이라는 하나의 공간이자 브랜드가 된 것도. 책과 사람을 통해서 여러 삶의 이야기를 읽어내다 보면 때때로 정말 부러운 경험들이 있다. 부러움을 사는 건 어떤 결과지만 사실 그 결과를 만들어 낸 과정, 즉 그 사람의 선택은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존경할 일이다. 그리고 존경하고 그칠 게 아니라, 나도 원하는 결과를 내 삶에 그려낼 수 있도록 적합한 선택을 하면 된다. 대부분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막연히 여기게 되는 그런 중요한 선택들을 과감하게 하기만 하면 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오랜만에 발표된 하루키의 신작이었다. 10월의 치앙마이 여행을 앞두고, 일부러 이 책을 읽지 않고 남겨두었다. 치앙마이의 올드타운은 정사각에 가까운 구 성벽과 얕은 해자로 성 바깥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 올드타운 내에 머무를 때에 읽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사실 '벽'의 의미도 알 수 없었지만 마냥 그게 어울릴 것 같았다. 거의 대부분의 구역에서는 흔적조차 없는 오래된 벽은 간혹 허물어진 채로 등장하는데 그 벽을 끼고 하루키가 새롭게 만든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건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 어떤 하루키의 세계보다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소설가의 일에 언제나 매료되며 동경하는 나에게 이 소설은 독특하게 이야기의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대신에 좋은 소비자로 남는 일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영상 형태의 콘텐츠는 정말 나와 거리가 멀다. 언제쯤에는 친해질 순간이 생길 수도 있을까 싶지만, 아무래도 문자(Text) 형 인간인지라 쉽지 않을 것 같다.
<첫눈에 반할 통계적 확률>
대학에서 통계학을 연구하며 여러 상황들을 숫자나 확률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철저한 스타일의 남자 주인공 (조금 귀여움). 살짝 덤벙거리지만 감정에 아주 충실한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 두 사람이 우연히 연말의 북적이는 공항과 비행기에서 만나서 벌어지는 로맨스를 다룬 영화다. 이 정도의 설정만으로도 대략 어떻게 결말이 펼쳐질지 충분히 그려지리라. 작품성, 영상미 같은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그냥 흐뭇하게 연말이나 주말을 보내기에 적절한 영화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역시 영화에 적절하게 알맞다.
작품성을 생각하며 선정한 건 절대로 아니고, 다만 이 영화를 본 장소나 상황이 딱 어울렸기 때문에 가산점을 받아 올해의 영화로까지 올라왔다.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호텔의 단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 비행기 이착륙 소리가 마치 효과음처럼 타이밍 좋게 들려서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더 몰입하게 됐다. 데이터와 확률에 익숙한 내 직무 때문에도 더욱 공감이 되고, 확률을 따져가며 바보같이 구는 상황에는 더욱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가 누군가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면 작품성을 떠나 그 사람에게는 좋은 영화다. 가을의 초입에 봤던 영화가 아직도 생생하다면 충분히 어워즈에 오를 가치가 있다. 올해 본 영화와 드라마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경쟁에서 유리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상황과 높은 확률조차도 이 영화의 운이 아닐까.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둔 곡을 반복해서 듣는다. 신곡이 나왔다고 들어보는 일도 드물지만, 주위에서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틀어본 신곡을 1분 이상 들어보는 경우도 많지 않다. 한두 번 듣고 바로 플레이리스트에서 제거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매년 그 해에 많이 듣는 노래들이 생긴다. 취향은 한결같기 때문에 매년의 노래들은 대부분 같은 가수의 곡인 경우가 많고, 올해도 그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부동의 첫사랑> - 10cm
그 해에 발표된 노래가 올해의 음악으로 선정되는 경우가 있다니 신기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오래된 노래를 뒤늦게 알게 된 것이리라 짐작했는데 2023년 봄에 발표된 곡이었다니! 작년에 정말 많이 들었던 10cm의 <그라데이션>을 밀어낸 노래가 바로 이 <부동의 첫사랑>이다. 같은 가수의 다른 노래로 2년째 일상의 멜로디를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거의 무한정 반복재생을 할 정도로 빠져서 들었고, 최근에는 그 정도로 집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외출할 때 처음 선택하는 곡은 70% 가까이 이 노래다. 다만 하반기 들어 약간 마음에서 벗어나 있다.
<정이라고 하자> - BIG Naughty (feat.10cm)
하반기 들어 <부동의 첫사랑> 대신 첫 곡으로 많이 선택된 노래다. 올해 처음으로 알게 된 가수였는데, 여러 곡들을 들어보다가 이 곡이 마음에 들어서 거의 정착하듯이 자주 들었던 곡. 이번에도 피처링으로 등장한 10cm가 놀라운데, 목소리나 주파수에 뭔가 끌림이 있는 걸까.
<딱 10CM만> - 10cm & BIG Naughty
변명의 여지없이 취향 x 취향의 선곡이다. <정이라고 하자>를 통해 빅나티를 알게 되고 나서 연관된 노래로 이 곡을 알게 되었는데, 또 10cm이기도 했고 내가 딱 좋아하는 템포와 멜로디 스타일의 노래여서 당연히 바로 플레이리스트에 자리 잡았다.
그 해에 좋아했던 콘텐츠들을 돌아보면 평소의 나를 보여주는 올곧은 취향(음악)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 해의 특별한 경험과 인상을 찾기도 하고(영화), 최근의 관심사를(책) 읽게 되기도 한다. 특히 매년의 독서 목록을 보면 나는 내가 올해 책으로부터 어떤 것을 읽고 싶었는지 알게 된다. 잘 정리된 독서노트나 목록은 어쩌면 그 특별한 한 해의 나 자신이 남겨놓는 편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매번 지나가는 똑같은 길이의 365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기록하기를 반복할 수밖에. 2023년의 내가 흐릿할 몇 년 뒤의 나에게는 좋은 사진 같은 메모가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