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게으른 마케터가 결국 이긴다”

Ting 리브랜딩이 던지는 역설적 교훈

by 마케터의 비밀노트

마케팅 업계에는 언제나 ‘바쁜 마케터’가 있었다. 브랜드 바이블을 갈아엎고, 로고를 새로 디자인하고, 캠페인을 완전히 새로 짜는 사람들. 변화가 곧 혁신이라 믿는 이들이다. 하지만 영국의 탄산음료 브랜드 Ting의 최근 리브랜딩은 이 질문을 던진다. “정말 그 모든 변화가 필요했을까?”

ting_2.png?w=608&ar=default&fit=crop&crop=faces&auto=format&q=100

소비자는 생각보다 ‘게으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Thinking, Fast and Slow』에서 인간의 사고체계를 두 가지로 나눈다.

System 1: 빠르고 자동적이며 감정적인 사고

System 2: 느리고 논리적이며 분석적인 사고

대부분의 소비자는 System 1으로 구매를 결정한다. 슈퍼마켓에서 치약을 고를 때, 우리는 성분표를 일일이 읽지 않는다. 익숙한 브랜드, 편안한 색, 긍정적인 감정이 떠오르는 제품을 집어 든다.

즉, 소비자는 ‘합리적 판단’보다 ‘즉각적 기억과 감정’을 기반으로 행동한다. 그렇다면 브랜드의 역할은 명확하다. 소비자의 게으른 두뇌를 자극할 만큼 명확하고 일관된 기억 구조를 만드는 것.


‘변화’가 아닌 ‘기억’을 쌓는 브랜드가 강하다

브랜드 과학자 바이런 샤프(Byron Sharp)는 이를 “Mental Availability (정신적 가용성)”이라 부른다. 소비자가 특정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브랜드가 되는 것, 즉 기억 속에서 쉽게 꺼내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일관성(consistency)이다.
코카콜라의 로고와 병 모양이 100년 넘게 거의 변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변화보다 반복을 통해 기억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coca-cola.jpg?w=1020&ar=default&fit=crop&crop=faces&auto=format&q=100

겉으로 보기엔 “게으른 마케터”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상 그들은 장기적 브랜딩 효과를 극대화하는 가장 ‘현명한’ 마케터들이다.


반대로, ‘바쁜 리브랜딩’이 불러온 문제

Ting, Lilt, Old Jamaica 등 최근 여러 탄산 브랜드는 로고, 패키지, 톤앤매너를 대대적으로 바꾸며 “새로움”을 추구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존 소비자의 인지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리브랜딩 후 Ting을 찾으려던 소비자들은 매대 앞에서 한참을 헤맸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익숙한 Ting”의 이미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디자인은 오히려 브랜드 인식을 초기화시켜버렸다.

결국 이들은 수십억 원의 광고비를 다시 투입해야 한다. “이게 여전히 Ting이다”라고 소비자에게 다시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soft_drinks.png?w=1020&ar=default&fit=crop&crop=faces&auto=format&q=100


‘게으름’은 전략이 될 수 있다

System1 연구소의 Andrew Tindall은 “게으른 마케터는 마케팅 과학의 법칙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150개 이상의 브랜드를 5년간 분석한 결과, 일관성이 높은 브랜드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높고 장기적 성장세도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를 ‘Compound Creativity (복합 창의성)’이라 정의한다.
즉, “새로움을 덧붙이기보다 기존 창의성을 축적하고 확장하는 것.”
변화를 최소화하며, 브랜드가 이미 쌓아온 상징과 감정 자본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마케팅의 역설: 덜 바쁠수록 더 강해진다

“게으른 마케터가 승리한다”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간의 연구가 뒷받침하는 실증적 진리다.

일관성은 신뢰를 만든다.
소비자는 변하지 않는 브랜드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반복은 기억을 강화한다.

같은 로고, 같은 톤, 같은 메시지는 ‘익숙함’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만든다.

게으름은 효율을 높인다.
무의미한 변화에 드는 비용과 리스크를 줄이고, 진짜 중요한 ‘인지 유지’에 집중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얼마나 ‘게으른가?’

Ting의 리브랜딩은 단지 한 브랜드의 디자인 변화가 아니다.
이 사례는 모든 마케터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소비자의 기억을 강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초기화하고 있는가?”

오늘만큼은 조금 덜 바쁘게, 브랜드의 본질을 곱씹어볼 시간이다.

효과적인 마케팅은 변화보다 ‘기억의 복리’를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은 마케팅의 새로운 경쟁력이다.
브랜드는 매번 새로워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지속적인 익숙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차별화다.

오늘은 퇴근을 조금 일찍 하고, 새로운 캠페인 대신 지난 캠페인을 복기하자.

마케팅 과학이 말한다 — “Change less. Be lazy. That’s how you win.”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불확실성 속의 공격적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