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토니 바카렐로가 재정의한 생로랑의 ‘시네마틱 브랜딩’
패션 하우스가 영화를 ‘스폰서’가 아니라 ‘창작 주체’로 다룰 때, 브랜드는 단순한 상품군을 넘어 문화의 일부가 된다. 생로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앙토니 바카렐로(Anthony Vaccarello)는 지난 몇 년간 Saint Laurent Productions를 통해 바로 그 지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 글은 그의 미학, 운영 방식, 인력·자본 전략, 그리고 한국 럭셔리·하이엔드 브랜드가 배울 수 있는 실행 포인트를 정리한 브런치형 분석이다.
DNA의 현재화: 바카렐로는 이브 생로랑의 코드를 ‘복원’이 아니라 ‘현재화’한다. 90년대 YSL의 완벽주의적 여성상을 오늘의 몸짓과 태도로 번역하고, 꽃과 레오퍼드, 레이스 같은 요소를 요가 저지나 애슬레저 맥락에 섞어 도심의 실재하는 여성으로 소환한다.
“Sex & Distance”: 그는 YSL의 핵심 정조를 ‘섹스와 거리감’으로 요약한다. 노출과 비노출, 욕망과 금욕 사이의 팽팽한 긴장—헬무트 뉴턴이 포착한 차가운 에로티시즘을 현대적 실루엣과 소재로 재배치한다.
‘트렌드’ 대신 ‘태도’: 틱톡 바이럴·팝업 줄세우기·‘쿨’의 자기복제를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줄 서는 럭셔리는 럭셔리가 아니다.” 바카렐로의 제품은 유통 방식부터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구매를 ‘소유자격의 증명’으로 설계한다.
바카렐로는 2023년 Saint Laurent Productions를 설립해, 단편(알모도바르·고다르)부터 장편(자크 오디아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파올로 소렌티노, 짐 자무쉬, 클레르 드니)까지 독립영화 생태계와의 전략적 공진화를 택했다.
운영 원칙:
감독 중심(Director-driven): 제작 간섭이 아니라 ‘르네상스의 후원자’처럼 제약 최소화·자율 최대화.
코스튬의 연속성: 바카렐로가 실제 의상을 디자인해 YSL의 시그니처가 캐릭터 구축의 장치로 기능.
단기 노출보다 장기 잔존: “쇼와 캠페인은 소모된다. 영화는 20~30년 후에도 남고, 크레딧에 생로랑이 남는다.”
브랜드 효과:
인지 채널 다변화: 패션 위크·광고 외 칸·베니스·TIFF 같은 글로벌 문화 무대에 ‘공식 출품작’ 자격으로 입장.
문화적 위계 상승: ‘패션 하우스’가 아니라 ‘메종-프로덕션’으로 포지셔닝—유산(Le Patrimoine Français) 서사를 강화.
내러티브 풍성화: 감독·배우·사진가·뮤지션 네트워크를 ‘확장된 생로랑 클리크’로 묶어, 브랜드 커뮤니티의 질을 높인다.
위험의 미학: 파리의 야간성, LA의 범죄사(크라임 누아르), 70년대 클럽 문화—‘위험’은 바카렐로의 기저 톤.
YSL 히스토리의 재활용: 1967년 부뉴엘의 Belle de Jour 코스튬, 1971년 ‘스캔달’ 컬렉션(‘나쁜 취향’의 전복)을 오늘의 실루엣과 스타일링으로 재맥락화.
젠더 간 대화: 최근 남성 라인은 거대 수트·클린치 웨이스트로 파워를 회복, 여성/남성의 관계를 ‘연인/동료’로 재배치. 시즌 간 ‘대전환’보다 아이디어의 증류와 연속성을 택한다.
민주화의 피로: “모두를 위한 럭셔리”는 럭셔리의 희소성과 의식을 갉아먹었다는 진단. 바카렐로는 획득 난이도·사적 경험·접근 제한을 통해 다시 ‘어려운 브랜드’를 설계한다.
인플루언서 대신 ‘실제’ 셀러브리티: 캐스팅 기준은 팔로워가 아니라 작품성과 깊이. 하이프를 거부하고, 취향 공동체를 키운다.
파리-로스앤젤레스 듀얼라이프: 창작의 베이스는 파리, 회복과 사적 삶의 무대는 LA. 작업-생활 리듬이 디자인의 톤을 안정화한다.
2025년 상반기 Kering 포트폴리오가 역풍을 맞으며 생로랑도 매출 역성장을 겪었다. 바카렐로의 시각은 담담하다. 디자이너 교체로 단기 매출을 뽑아내려는 방식의 피로를 지적하며, “예술과 구축”의 장기 기초체력을 말한다. 동시에 Kering의 경영 리더십 재편(비패션 백그라운드의 CEO 영입)은 오퍼레이션·자본 효율의 재정렬을 예고한다.
콘텐츠의 ‘보존 가치’에 투자: 캠페인·룩북보다 아카이브화 가능한 장르(영화·출판·전시)에 CapEx 배분.
‘감독 중심’ 거버넌스: 크리에이티브 간섭 최소화, 승인 라인 간결화, 제작사와의 신뢰 자본 축적.
코스튬-프로덕트 브리지: 스크린 속 의상을 상업화하되, 희소성과 구매 경험의 의례성을 유지.
커뮤니티의 질 관리: 캠페인 모델은 한 시즌의 ‘인기인’이 아니라 장기적 동반자.
도시-공간 전략: 파리(창작)–LA(휴식/네트워킹)–베니스/칸/토론토(공식 무대)로 브랜드 동선을 구축.
하우스 코드의 ‘현재화’: YSL의 상징(턱시도, 사파리, 팬츠 수트)을 현대적 소재·비율·스타일링으로 재조립.
공포 없는 리스크 테이킹: 논란 회피보다 ‘예술적 위험’의 관리에 초점—브랜드 담력은 자산.
리테일의 비가시화: 줄세우는 팝업보다 프라이빗 살롱·인비테이셔널 피팅—구매 여정을 절제.
출판·북스토어·레스토랑: SL Éditions·Babylone·Sushi Park 등 생활 동선에 스며드는 공간형 자산.
시즌 간 증류: 쇼마다 ‘대전환’보다 아이디어의 지속적 정제로 브랜드 문법을 단단히.
A. 프로덕션 셋업
(1) Director Slate 구축: 2~3년 단위로 협업하고픈 국내외 감독 라인업과 장르 맵 작성.
(2) 제작 파이낸싱 룰: 감독 최우선·브랜드 간섭 최소 원칙을 계약서에 명문화.
(3) 코스튬-머천 커넥션: 스크린 피스는 수량 한정+스토리 카드로 리테일 연결.
B. 문화 채널 포트폴리오
(1) 영화제·뮤직필름·단편 OTT 릴리즈를 연간 캘린더화.
(2) 하우스 코드 리서치: 과거 아카이브의 심벌·실루엣·텍스타일을 오늘의 룩으로 리믹스.
(3) 공간 자산: 북룸·살롱·키친랩 등 작은 문화거점을 도시에 심기.
C. 커뮤니케이션 원칙
(1) 인플루언서=도달 확대 수단이 아니라 맥락의 해설자로 포지셔닝. (2) 유통은 ‘쉽게 보이되, 쉽게 닿지 않게’—발견감·초대감 설계. (3) 성숙 타깃 중심 메시지: 나이·경력·취향을 가진 여성의 자존과 취향을 존중하는 카피.
2023: Saint Laurent Productions 출범—알모도바르·고다르 단편 지원, 하우스의 영화 제작 본격화. 2024: 칸에 Emilia Perez(자크 오디아르), The Shrouds(크로넨버그), Parthenope(소렌티노) 등 출품.베니스에선 짐 자무쉬 Father Mother Sister Brother 공개, 토론토에선 클레르 드니 The Fence 상영.
지속: 자무쉬 단편 French Water—감독·배우 네트워크를 하우스 커뮤니티로 편입.
위험 / 절제 / 거리감 / 아카이브의 현재화 / 감독 중심 / 소모 대신 잔존 / 엘리트주의 / 연속성 / 공간 자산 / 커뮤니티의 질
바카렐로는 유행을 빠르게 ‘캐치’해 매출을 치는 공식을 거부한다. 대신 욕망이 형성되는 더 느리고 단단한 층위—영화·출판·공간·커뮤니티—에 투자한다. 그의 철학은 간단하다. “사람은 사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원하게 만드는 것이 패션의 마법이다.”
생로랑은 그 마법을, 런웨이의 15분이 아니라 스크린의 120분, 서가의 한 권, 살롱의 한밤으로 연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브랜드의 품격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