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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향수를 흔들다

디지털 커뮤니티의 사랑과 불신

by 마케터의 비밀노트

몇 년 전만 해도 향수 산업은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세계였다. 조향사는 브랜드의 ‘노하우’를 철저히 감추며 향을 만들어냈고, 소비자는 완성품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이 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누구나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에서 향수 리뷰를 올리고, 자신만의 향 조합을 공유하며 ‘퍼퓸토크(PerfumeTok)’라는 거대한 디지털 집단지성이 형성됐다.

그런데, 이 혁신의 다음 단계가 ‘AI’라면? 커뮤니티는 이를 환영할까, 거부할까.


AI 향수 인플루언서, 그리고 반발

지난 7월, 6만 5천 명 이상의 팔로워를 가진 틱톡 향수 크리에이터 엘리스 그레니에(Elise Grenier)는 인스타그램에서 새로운 팔로워 알림을 받았다. 이름은 ‘아이리스 레인(Iris Lane)’. 문제는 이 계정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만든 가상 향수 인플루언서였다는 것.

이 계정을 만든 건 프래그런스 인큐베이터 슬레이트 브랜드(Slate Brands). 하지만 커뮤니티 반응은 싸늘했다. “향수를 만드는 데 AI를 쓰는 건 이해하지만, 향을 해석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AI가 맡는 건 너무 낯설다”라는 그레니에의 반응처럼, ‘예술의 감상자’까지 기계로 대체하는 발상에 불편함이 폭발했다.
결국 아이리스 레인의 계정은 며칠 만에 사라졌다.


그럼에도 AI는 이미 들어왔다

짧게 끝난 사건과 달리, AI 자체는 향수 산업 깊숙이 들어왔다.

프라다(Prada)는 2024년 신제품 Paradoxe Virtual Flower에서 AI로 만든 자스민 향 조합을 강조했다.

스타트업 Osmo는 AI 향수 제조를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웠고,

Symrise와 Givaudan 같은 글로벌 조향 회사도 자체 AI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AI 지지자들은 “AI가 폐쇄적인 향수 산업을 민주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하는 사람들은 “속도와 비용 절감보다 중요한 건 인간의 창의성과 감정”이라며 우려를 표한다.


커뮤니티의 ‘조심스러운 낙관’

니치 향수 리테일러 트위스티드 릴리(Twisted Lily)의 디지털 전략 책임자 올랴 바(Olya Bar)는 “AI의 창작과 규제 관리 잠재력은 크지만, 인간의 문화적·감정적 뉘앙스를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AI 기반 가상 쇼핑 어시스턴트 ‘릴리’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여전히 소비자 심리를 세심히 살피며 접근 중이다.


속도 vs. 예술성

저가 향수 브랜드 파이너리(Fine’ry)는 마케팅과 제품 출시 속도를 높이기 위해 AI를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엘리스 그레니에는 “새로운 향수를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출시하려는 압박이 창작의 즐거움을 빼앗고, 과소비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아리조나 기반 스타트업 ‘사이클(Scircle)’의 공동창업자 이선 터너(Ethan Turner)는 AI를 소비자 맞춤형 향수 제작에 활용할 계획이다. 그는 “어떤 기술이든 악용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것을 도구로써 어떻게 활용하느냐”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반복된 불안

사실, 새로운 기술을 둘러싼 불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70년대 가스크로마토그래피(GC) 장비가 향수 조성 분석을 가능하게 했을 때도 비슷한 우려가 있었다. 향수 문화는 ‘희소성’과 ‘비밀스러움’을 마케팅 무기로 삼아왔기에, 이를 위협하는 기술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아트 앤 올팩션 인스티튜트 설립자 삭시아 윌슨-브라운(Saskia Wilson-Brown)은 “향수 경험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물리적이며, 신체적인 것이다. 이 부분은 AI가 절대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AI 시대의 향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AI는 향수를 만드는 속도와 효율을 높일 수 있고, 새로운 창작 방식을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향수가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향’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람의 기억, 이야기, 감정이 담겨 있다.
가장 중요한 건 AI가 인간의 창의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확장하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쓰이는 것이다.

결국 향수 산업의 미래는 기계의 계산 능력과 인간의 감각적 서사가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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