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 라디오에서 우연히 알게 된 멋진 말을 희망을 담아 써 뒀던 건데, 최근까지도 앙드레 말로의 문장인 줄 알았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다시 찾아봤다.
André Malraux. 그는 여러모로 훌륭한 작가였던 한편, 정치인답게 지략가에 약은 면모도 존재했던 듯하다. ...뭐, 작가는 작가고 작품은 작품이지.
어쨌든 원문을 살펴봤다. Celui qui regarde longtemps les songes devient semblable à son ombre. 대충 직역하면 오랫동안 꿈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를 닮아간다. 응? 어째 기존 번역문이 더 와닿는다. 청출어람인가. 아니, 그런 것보단 왠지 번역문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원래 다른 뉘앙스로 쓰였을 것만 같다. 원문을 검색하니 proverbeindien이라고 나온다. 이상하다. 거기다 Indian이란 말은 습관적으로 미국 원주민을 떠올리게 한다. 사고 회로가 번거롭다. 어릴 때 인디안밥을 너무 먹었다. 어쩌면 인도 속담을 작품에 차용한 게 번역된 후에 그 문구만 인용되면서 작가의 말인 것처럼 인식된 게 아닐까...뒤죽박죽이구먼.
유달리 한국에서 이 말이 유명해진 건, 혹시 내가 들었던 라디오처럼 공신력 있는 매체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긍정적이고 멋진 말로서 퍼뜨렸기 때문인가. 제길, 나도 덩달아 한몫했으려나. 앙드레 말로는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고 고고학 탐사라는 명분으로 크메르의 유물도 당당히 도굴했다고 하는데, 본의 아니게 속담까지 슬쩍하게 만들어 준 셈인가. 흐음... 찜찜해. 전후 맥락을 알 수 없으니 뉘앙스가 엄밀히 어떠하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열심히 뒤졌다. 오랫동안 뒤진 사람은 마침내 찾아낸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앙드레 말로도 말라바르의 속담이라고 써 놓았다. 내용이 아니라 책의 속표지에 이 속담만 따로 적어 놓은 거라서 앞뒤 문맥이 없는 게 문제였나...
말라바르(인도의 지명) 유래인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일부 의견도 보인다.
게다가 해당 속담 관련 해설을 이것저것 보다 보니 어째 <너무 다른 널 보면서>라는 곡의 너를 닮아가는 건 나를 잃을 뿐인데라는 가사가 떠오른다. 영문 버전을 검색해 보면 한 술 더 떠서 He who dreams for too long will become like his shadow라고 하니, 너무 오래 꿈꾸면 큰일 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느껴지지 않는가. 그림자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애매해서 생긴 일이겠지만, 불어 문장엔 없는 부사 마침내와too가 미치는 영향이 참 대조적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의 표본이구먼. 오랫동안 헛꿈만 바라보고 아무것도 안 하거나 뜬구름만 잡으려는 자는 자기 그림자를 닮게 된다, 정도로 해 두고 싶다.
결론.
오랫동안 꿈을 그린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라는 한국어 문장은 앙드레 말로의 말이나 속담이 아니라 그냥 정체 불명 번역자의 명언이라고 보는 게 낫겠다.
확인해 본 한국어판들에서 이 제사는 제대로 번역이 돼 있거나 아예 생략돼 있다.
번역자야말로 작가의 그림자 같은 존재건만. 그림자가 어느 정도 실체와 다르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오역을 너무 멋지게 해서 이런 사태가 생기기도 하다니- 재창조가 돼버렸다. 적당한 의역은 가독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늘 조심해야겠다.
다만, 가볍게 희망을 담아 써 둬 볼까 싶었던 이 말을 오래도록 차용하게 된 이유는 언제부턴가 그게 정말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그래서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고, 여전히 좋다. 구하라, 얻을 것이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와 방향은 같은데 보다 현실적이고 완만하면서도 예쁜 표현이라, 한층 삼키기 쉬운 느낌.
어쨌거나 순기능으로 널리 알려져 버려서 그냥 되돌리기엔아까운 말이 되었으니해당 문장은 국내 명언으로 따로 살려두면 되지 않을까. 역수출? 격언이 될지도.
진상은 오리무중이지만... 위에 링크해 놓은 '오해와 진실' 글을 앙드레 말로 연구의 현재 권위자께서 2009년에 업로드해 주셨으니, 좀 더 일찍 다시 검색을 해 보면 좋았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