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PTSD의 개념과 차이점
전남편의 외박에 이제는 체념에 가까운 해탈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던진 그의 말 한마디에, 설명할 수 없는 촉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 순간 잠들어 있던 나의 추리력이 깨어났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확인이었지만, 그날 밤 나는 그의 10년치 과거를 모두 마주하게 됐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맞았고 그제야 현실을 마주했다.
그의 과거는 캐낼수록 양파처럼 끝없이 벗겨졌다. 하지만 그렇게 쏟아지는 증거들을 앞에 두고도,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눈으로 확인한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였으니, 증거가 없던 시간들에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곁에서 보냈던 지난날의 의구심들이 하나둘 퍼즐 조각처럼 제자리를 찾아갔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남자들의 일탈이 극에 달한 흔적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안 해본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쏟아지는 증거들 앞에서 나는 오히려 설명하기 힘든 미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나는 누구와 함께 살아온 것일까? 그의 주변 인물들 역시 그와 한통속이었다. 하루밤만을 위해 사는 하루살이처럼, 그들은 서로의 미친 일상을 공유하며 함께하고 있었다.
판도라 상자의 추악한 비밀을 알게 되고 나서야, 나는 긴 결혼생활 동안 그의 가스라이팅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럼에도 그 순간만큼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나는 곧바로 외박 금지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고, 그날 이후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외박을 막아냈다.
사실 두려웠다. 이혼이 눈앞까지 다가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알고 싶어졌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어떻게 그렇게 속아 올 수 있었던 것인지. 들키지 않을 거라 믿으며 범죄에 가까운 일탈을 일삼던 그의 뒤를 캐기 시작했고, 나는 증거를 모았다. 그리고 내가 그를 단속하면 언젠가는 고쳐질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썩어 문드러져 가는 마음을 붙잡고, 바가지 대신 헌신하듯 그를 도왔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증거를 모았다는 이유로 나는 이혼을 당했다. 그렇다 해도 후회는 없다. 이혼을 선택한 것 역시 결국 나였으니까. 다만 후회가 있다면, 더 일찍 이혼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도파민에 취해 있는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자각할 의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난 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안 해본 노력은 없었다. 처음에는 달랬고, 때로는 이혼을 입에 올리며 협박도 했다. 잘해주기도 해봤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가 이미 열렸음에도 끝까지 부인하는 그의 태도 앞에서, 그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끝없이 낮아져만 갔다.
반대로 그의 요구는 점점 더 대범해졌다. 또다시 대출을 받아 달라 했고, 내 신용을 이용하려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드러난 뒤에도, 그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또다시 나에게서 무언가를 더 얻어갈 생각을 했던걸까.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바랐던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다. 더 이상 다른 여자들로 인해 나를 울리지 않는 것. 그조차 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던 걸까. 그래서 나는 그의 요구를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내 아이들의 아빠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붙잡고 놓지 못했던 1년이라는 시간들은 잠시나마 아이들에게 아빠와의 추억을 쌓는 시간이 되었다.
그가 다시는 같은 일탈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가 술에 취해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날이면 몇 킬로미터를 걸어 대리기사처럼 그를 데리러 가기도 했고 부부 상담도 받았었다.
그럼에도 그는 몰래 빠져나가 여자를 끼고 노는 일을 여러 번 들켰다. 나는 그의 일탈을 깨부수듯 뒤쫓아 다녔다. 원래 세상사에 무심한 편인 내가 이 사람을 단속하며 사는 일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 일이었다. 그는 몰랐지만 정말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착도 병이라는데 나는 그 집착마저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상태였으니까.
어느 날은 집에서 사라진 칼을 보고 그가 어디에 두었는지 물었다. 사용하지 않아 서랍장에 넣어두었다고 하자, 그는 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숨겨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사람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 존재인데, 내가 왜 굳이 죽이겠느냐고 되물었다. 그 말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스로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부부 간의 신뢰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노력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은 아이들에게 ‘아빠’라는 자리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를 사랑한 적이 있었던 게 맞는지. 그를 좋아했었고 함께 있는 것이 편했지만, 설렘을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사랑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연애하던 시절 그는 분명 나에게 설렘을 느끼는 게 전해졌고, 날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이토록 내 마음을 무너뜨리고도 아무런 반성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봐왔기에 나는 궁금하다. 과연 나는 다시 남자의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도 함께 살아보기 위해 고쳐보겠다고 헌신한 끝에 내게 남은 것은 트라우마를 시작으로 PTSD를 잠시 겪으며 자율신경실조증과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그를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내 생각은 오만했고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다.
물리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어떤 경험들은 사건이 끝난 뒤에도 몸과 신경계에 깊이 각인된다. 머리로는 이미 지난 일임을 알지만, 뇌와 자율신경계는 여전히 위험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반응한다.
오래전에 끝난 일인데도 심장이 계속 아픈 이유는, 트라우마 반응이 PTSD로 고착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PTSD가 장기화되면 신경계의 경보 상태가 풀리지 않아 자율신경계 불균형, 즉 자율신경실조증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전문의가 아닌 개인적 정리이며, 의학적 진단 기준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 트라우마와 PTSD의 차이
트라우마 (Trauma)
트라우마는 위협·충격·무력감의 경험이 신경계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특정한 사람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반응이다.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는 트라우마 이후 나타나는 의학적·정신의학적 진단명으로, 일정한 기준과 기간을 충족해야 한다. 트라우마 반응이 시간이 지나도 완화되지 않고 고착되어, 일상 기능에 지속적인 장애를 초래하는 상태를 말한다.
2. PTSD 진단의 핵심 조건
PTSD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외상 경험 이후 발생한다.
- 생명에 대한 위협
- 심각한 신체·정신적 폭력
- 성적 침해
- 극심한 배신
- 반복적·장기적인 외상 경험
이러한 사건 이후
- 1개월 이상 증상이 지속되고
- 일상생활, 인간관계, 수면 등에 명확한 기능 저하가 나타날 경우 PTSD로 진단될 수 있다.
3. PTSD의 핵심 메커니즘
PTSD는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뇌와 신경계가 아직 ‘위험이 끝났다’고 인식하지 못한 상태다.
- 편도체: 과잉 경보 상태 유지
- 전전두엽: 감정 조절 및 판단 능력 저하
- 해마: 과거와 현재의 시간 구분 혼란
이로 인해 현재가 안전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몸에 안정감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흔적이고, PTSD는 그 흔적이 현재의 삶을 계속 지배하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