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앝 May 06. 2019

리셋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유혹

골치 아픈 건 싫고 깨끗한 공책만 쓰고 싶은 나에게

 새 출발은 대체로 즐겁다. '출발'이라는 단어가 주는 개방감과 가능성, 그리고 '새로움'의 기대와 설렘이 만났으니 '새 출발'은 얼마나 경쾌하고 산뜻한 말인가. 이 매혹을 거부할 재간이 없는 우리는 매해, 분기, 달, 주마다 새 출발하는 기분을 낸다. 1월 1일에 세운 목표를 실천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모르긴 몰라도 달력과 시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엔 분명 자주 새 출발을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버무려져 있을 거다.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욕구불만의 회피 반응이라고 한다지만 나는 이 또한 욕구라 부르겠다. ‘리셋 욕구’. 어린 시절, 책상 정리를 하고 나면 버려야 할 공책이 교과서보다 높게 쌓였던 기억이 난다. 앞에 서너 장만 쓰고 내팽개친 노트가 많아서였다. '이번에는 예쁘게 정리해야지.' 작정했던 결심이 오래 못 가고 대충 써서 못생겨진 종이 뭉치가 보기 싫었다. 연필 자국이 있는 쪽수보다 안 쓴 페이지가 더 많아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 후부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만 티 안 나게 찢어냈다. 오려낸 흔적이 거슬렸지만, 다시 시작하기에는 충분했다.


 누구든 새 이름으로 새 인생을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여기, 공책을 바꾸는 걸로 모자라 이름을 바꾼 사람이 있다. 소설가 로맹 가리는 문학계와 평론가들이 자신에게 씌운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 새 이름으로 살기를 택했다. 간혹, 느리지만 조금씩 변해가는 진짜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 각인된 또 다른 나와 교제한다는 걸 깨닫는다. 굳어진 인식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새로 사는 게 더 빠르겠다는 마음이 일 때도 있는 법이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 외에도 수많은 가명으로 글을 짓고, 작가뿐만 아니라 비행사, 외교관 등 변화무쌍한 인생을 살았던 걸 보면 그가 리셋 욕구가 컸던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속 그는 어떤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있을까

  이미 시작했던 걸 또다시 시작하고픈 충동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걸까. 무엇이든 이제 막 시작한 사람의 발걸음은 호기롭고 위풍당당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워 의욕이 넘친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좌우로 헛발질을 하는 나를 만나게 된다. 갈데없이 허공을 차는 미련함을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워 눈꺼풀을 내려 앞을 가린다. 인제 어쩌지. 이렇게 계속하다간 엉망진창이 될 게 뻔해. 지나온 일들을 수습하며 고군분투할 앞날을 상상하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가까운 날에 나를 덮칠 난관에 숨이 턱 막힌다. 누구나 힘든 건 하기 싫다. 부담스럽고 보고 싶지 않은 미래를 회피하려는 자기 방어와 두려움이 하모니를 이뤄 나를 원점으로 데려간다. 아. 골치 아파. 이번 판은 망한 것 같으니 다시 시작하자. 우리는 이렇게 공책을 바꾸고, 회사를 바꾸고, 취미를 바꾸고, 애인을 바꾼다.


 매번 같은 자리에서 멈춘 사람은 영원히 같은 문제들만 풀면서 산다. 수학 문제지를 끝까지 못 풀어본 중1이 1단원인 집합 문제만 백발백중하는 것과 같다. (요즘은 중학교 수학에서 집합을 안 배운다고 들었지만.) 시험날이 되면 안다. 제 아무리 집합 박사여도 집합 만으로는 10점밖에 못 채운다.


 오늘의 나를 데리고 내일도 살아갈 게 막막해 종종 과거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10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더 신나게 놀아야지. 20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더 많이 도전해야지. 30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더.. 다시 살아봤자 별반 다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아직도 무용한 공상을 한다. 천의무봉(天衣無縫) 같은 흠결 없이 매끈하고 맵시 나는 삶을 살아보고 싶은 바람일 거다. 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곳에 꿰맨 자국이 없는 옷이란 없다. 바늘 자국 없이 팔만 완벽하게 지은 옷보다야 누덕누덕해도 적당히 바람을 막을 정도면 괜찮은 옷 아닐까. 싸구려 옷이야 해지면 쉽게 버리지만, 명품은 원래 고쳐 쓰지 않나. 너랑 나 정도면 명품이지 않나.

매거진의 이전글 맞춤옷처럼 꼭 맞는 축사를 위해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