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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Apr 21. 2019

맞춤옷처럼 꼭 맞는 축사를 위해 1

오랜 친구 앞에서 읽는 편지

 가까운 이의 결혼식 축사 준비로 막막하신 분들께 경험담과 예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소꿉친구의 결혼식 축사를 부탁받았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며 큰 소리를 떵떵 친 업보다. OK 할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많아진 건 작정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였다. 누군가의 잔치에 한 꼭지를 맡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가까운 이라면 어깨는 더 내려앉는다.


 지루하지 않고 오글거리지 않으면서 적당히 유쾌하고 무례하진 않되 감동적인 뭐 그런 거 없을까? 백지부터 쓰려니 막막해 “결혼식 축사”를 검색했다. 세상엔 좋은 말들이 넘쳐난다. 어디서 들어본 소리라는 게 문제지. 아무개의 결혼식에서 읊어도 어색하지 않은 상투적인 편지는 주고 싶지 않다.


 기지배가 그동안 해줬던 얘기들이 뭐더라. 기억력은 믿을 게 못된다. 미천한 기억에 의존하다가 꼬박 세 시간을 앉아서 한 자도 못 두드렸다. 깜짝 같은 소리 하네. 그냥 물어봐야지. 자주 하던 데이트가 있니. 너희는 뭐가 잘 맞고 어떤 게 달랐니. 응 그래 고마워. 이걸로 밥이라도 지어볼게.


 글이 나왔다고 끝난 게 아니다. 이미 축사 경험이 있는 지인들이 도장으로 찍어낸 듯 해준 말이 있다. 염소가 된 내 모습을 마주할 거라고. 축사를 써 온 종이가 팔랑거리도록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메헤헤헤헤 읽을 거라고 했다. 쓴 글을 다 외울 정도로 연습을 했지만 아쉽게도 난 염소가 됐다. (외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길지 않은 글이다 보니 외워져 버렸다.) 축사를 준비하는 분들께 당부한다. 염소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꽃비가 내리는 2019년 봄, 웨딩드레스를 입은 친구를 바라보며 편지를 읽었다. 메헤헤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의 주인공, 봄날의 목련처럼 우아한 신부 OOO 양의 오랜 친구입니다. 오늘 와주신 귀빈 여러분을 대신해 축하의 말을 전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혹시 fan이라는 말 아세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을 fan이라고 하죠. 제 친구 OO는 친구들 사이에서 “남친팬”으로 불렸어요. 남자 친구를 연예인처럼 좋아하는 거예요. 무려 8년 을요.

 둘의 사랑이 어느 정도 무르익고 신랑 ㅁㅁㅁ 군을 소개받았는데요. 아 제 친구만 남자 친구 팬인 줄 알았더니 ㅁㅁㅁ 군도 못지않은 여자 친구 팬이더라고요. 둘이 한 시도 눈을 못 떼고 손을 꼭 잡은 게 당시 제가 솔로여서 그런지 솔직히 좀.. 눈꼴셨습니다.

 제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부부를 보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서로를 팬처럼 열렬히 사랑해야 평생의 단짝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걸요.

 두 분께 부러움과 축복의 마음을 담아, 축시를 드립니다.


부부의 일

문득
어머니와 아버지를 봅니다
한 쌍의 부부를 봅니다

부부는
평생토록 세 가지를 함께 합니다
장을 보고
밥을 먹고
TV를 봅니다

사실 부부는
평생토록 한 가지를 함께 합니다
장을 보며 수다를 떨고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TV를 보며 수다를 떱니다

부부란
평생토록 함께 수다를 떠는 것입니다

수다는 별명이 많습니다
가끔 다툼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수다의 다른 이름은
화해
이기도 합니다.

수다는 외로움이 많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대신
두 개의 입술이 만나면
세상 어떤 어려운 문제도 척척 풀어낼 수 있습니다

여자는 친구에게 말합니다
하루 중 남자와 수다를 떠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요
매일
이 남자와 수다를 떨 생각에 행복하다 말합니다

평생토록 가장 많이 하게 될
그 일을
제일 좋다고 고백하는 그 여자가
부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식 내내 잇몸이 보이도록 웃는 게 걱정 안 해도 잘 살 것 같다.


- 19.04.20


또 다른 축사 <주례 없는 결혼식의 주례,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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