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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Apr 17. 2020

에어팟 프로를 닮은 너

네 귀에 들어온 말

에어팟 프로를 닮은 너

 올해 1월, 에어팟 프로를 장만했다. 내게 두 손의 자유를 선물했던 에어팟에 이어 소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해줄 하얀 콩나물 대가리. 30만 원이 넘는 거금을 쓰면서도 주저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시청 따위는 생략했다. 애플이다. 무조건 만족할 것이다.


 나는 붐비는 통근길을 표현하고 싶을 때 예외 없이 선택받는 초록색 노선을 타고 출근한다. 하얀 머리 콩나물의 재주는 기대 이상이었다. 딸깍 하고 줄기에 붙은 버튼을 누르고 나면 부대끼는 강철 박스 안에 나만의 1 평이 열렸다. 의식 없이 들어오던 소음의 양을 그제야 체감했다. 2호선의 배경음은 ‘잠시만요.’이다. 패딩이 아니어도 옷깃이 스치면 바스락 소리가 난다. 나의 자그마한 숨소리는 옆 사람에게 지하철 문이 열리는 소리 보다 크게 들린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자신 있게 말한다. 당신은 에어팟 프로가 필요하다. 노이즈 캔슬링 만세. 줄어든 소음만큼 공간은 넓어진다.


 칵테일 파티 효과라는 게 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시끄러운 주변 소음 속에서도 대화 상대의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듣는 현상에서 유래했단다. 한 마디로 중요한 것, 필요한 것만 골라 듣는 기술이다. 강남 한복판에서도 “선미야!” 소리에 뒤를 돌아보게 하는 신통한 능력. 그러니까 에어팟 프로는 나 대신 칵테일 효과 해주는 거지. 주변 환경에 개의치 않고 내게 의미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사랑에 빠진 상태와 닮았다.


 내가 처음 칵테일 효과를 체감한 건 사랑이에게서였다.

 “왕왕왕왕! 왕왕! 와와왕!”

 “왜 그래, 사랑이”

자다가도 별안간 목청을 높이는 녀석 때문에 우리 가족은 하루에도 몇 번 씩 놀라곤 했다. 신기하게 사랑이가 왈왈거리고 나면 현관에선 삐-삐- 소리가 났다. “아빠다!” 10만대가 넘는 쏘나타 가운데서 김 영감님 엔진 소리만 기막히게 선별해내는 신통방통한 귀. 세상에 많은 소리 중에 너는 어떻게 우리 집을 향한 발소리만 쏙쏙 골라내는 걸까. 너에게 402호와 가까워지는 소리는 정말 중요한가 봐. 나는 멋대로 사랑이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해석하며 종종 흐뭇했다.


 2020년 4월 14일 총선 전날, 우리 가족은 연차를 썼다. 사랑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1년 전만 해도 현관문이 열리면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앞장서던 사랑이는 오늘, 계단 앞에 멈춰 섰다. 20cm짜리 절벽 아래를 흘끔 보고 내 얼굴을 다시 올려본다.

 “알았어, 안아줄게.”

10분이면 도착하던 동물병원 문을 열기까지 15분이 걸렸다. 이제 너는 달리지 않는다.


 “아이가 일주일쯤 전부터 못 듣는 것 같아요.”

살면서 가장 많이 썼다는 이유로 사람은 관절과 치아가 가장 먼저 닳는다고 한다. 우리가 너무 자주 집을 비워서였을까? 김가네와 가까워지는 발 소리에 너무 많이 귀 기울여서 너는 귀가 제일 먼저 닳아버렸다. ‘아이가 혹시 불편해할까요?’ 라는 질문에 의사 선생님은 정작 너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요즘 너는 종종 길고 곤한 잠을 잔다. 의사 선생님 말씀처럼 편안한 표정을 하고서. 그 안에 줄어든 소음만큼 넓은 잔디를 달리는 꿈이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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