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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Feb 12. 2021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던 너

소심한지구방위대원의 탄생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를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만 19세를 막 지날 무렵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나는 휴지를 많이 쓰는 사람이다. 내 위가 몇 잔의 술을 감당할 수 있는지 스트레스 테스트를 감행하던 학부 신입생 시절,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을 자리가 없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무엇을 닦느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자리에만 휴지가 수북했다. 다음 날 신촌 현대백화점을 지나는 길에 손수건을 샀다. 내가 쌓은 휴지에 내가 불편해지자 내 인생에 손수건이 왔다.

 독립하면서 알게 됐다. 게으른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급기야 시간이 더 비싸다는 핑계로 빨래를 멈췄다. 빨래 대행 서비스 런드리고를 계속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서울을 벗어날 마음이 없다. 빨래 없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집을 넓게 쓰는 것이고, 눅눅하지 않은 상쾌한 주말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고, 오밤중에 옆집 눈치 볼 일이 없어지는 것이고, 더 재밌는 일들을 하며 나와 놀 수 있다는 것이다. 개소리다. 그냥 나태한 것이다. 빨래하지 않는 시간에 결국 누워 있을 거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베짱이 김선미가 하는 의외의 의식이 있다. 김선미는 주말마다 주중에 들고 다닐 손수건을 다린다. 정갈한 손수건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면 정돈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미신은 싫지만, 가끔 친구 지갑을 구경하다 나오는 부적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손수건 다림질을 하다 문득 추억에 빠진다. 학부 시절 CC였던 N군은 알려주었다. 내가 더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N군은 교양 시간에 잠자면서 알게 됐다. 대강당 지정석에 앉아 듣는 수업이었다. 지하철, 버스, 교실 책상, 길, 술집, 남의 집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잘 자는 내게 대강당 푹신한 의자는 너무도 편안했다. 등받이에 반쯤 기대 누워 자다가 나는 N군 어깨에 완전히 누워 잤다. 그렇게 우리는 이름을 알게 됐다. N군과 썸 타던 계절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변덕스럽게 비가 오는 끈적한 철이었다. N군은 연애하는 5년 내내 더위를 심하게 탔는데, 땀 흘리는 N군의 이마는 썸 타기에 좋은 장치였다. 그해 여름 나는 잘 다려간 손수건으로 N군의 이마를 닦아주다가 미묘한 감정을 완성했다. 그는 우리가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서도 그날을 자주 회상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내 더러운 이마를 깨끗한 손수건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주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뻤어.' 그걸 시작으로 우리는 서서히 서로의 이에 낀 고춧가루를 알려줄 정도의 사이가 됐다. 나는 여전히 손수건과 함께 N군과 데이트를 했다. 그가 좋아하는 까르보나라를 나눠 먹다 서로의 입가에 묻은 크림, 영화를 보고 나와 화장실에 들른 후 남은 손의 물기 등을 모두 그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비염이 있는 나는 자주 코도 풀었다. 손수건으로 코 푸는 모습을 처음 보던 그가 물었다.
"평소에도 손수건에다 코 풀어?"

 너랑 있어서 특별히 손수건에다 코 푼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말해주었다. 식당에서 테이블도 닦고, 더러운 바닥에 앉을 때도 쓰고, 구두코에 튄 흙탕물도 닦고 여러 가지를 한다고.
 "그럼 내 이마도 그걸로 닦아준 거야?"
 여자들 옷 주머니는 유독 작아 손수건을 두 장 들고 다닐 여력이 안 된다. 그는 그날 이후로 내가 손수건을 꺼낼 때마다 흠칫 피했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주문해보자. 햄버거만 주지 않을거다. 트레이에는 주문하지 않은 휴지가 한 두 장 꼭 깔려있다. 일행과 식당에 갔을 때 수저를 준비해주면서 예의상 깔아주는 휴지 등 우리는 아무것도 닦지 않고도 휴지를 버린다. 뽑아 쓰는 간편 행주라는 이름으로 한 번 쓰고 버려지는 물휴지, 하루 평균 8번은 쉬하고 하루 한 번 응아 하는 동물이라 쓸 수밖에 없는 휴지 등을 포함하면 그 양은 더 대단하다. 통계에 따르면 1년간 4인 가족이 사용하는 두루마리 휴지는 약 92개라고 한다. 미국의 경우 연간 버려지는 휴지심이 170억 개라고 한다. 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2개를 올릴 수 있는 양이다. 버려진 휴지 전체가 아니라 휴지심 만으로 말이다. 휴지를 못 아껴서 심만 아낀대도 의미있는 양이다. 실례로 휴지심 낭비를 피하고자 미국의 킴벌리 클라크 사는 심 없는 두루마리 휴지를 개발했고, 중국에서는 심 없는 두루마리 휴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손수건을 지니고도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휴지를 쓸 때가 많다. 아침에 외출할 때 허둥대다가 못 챙기고 나설 때도 적지 않다. 손수건을 빨고, 다리고, 각을 맞춰 접고, 주머니에 넣기까지 사소하지만 귀찮은 게 사실이다. 입이든, 테이블이든, 얼굴이든 어딘가를 깨끗하게 하려다가 더러워진 손수건을 다시 사용해야 할 때 고민스러워지는 순간은 거의 매일이다. (결국, 나는 더러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없을 때 보다 있을 때 더 불편한 손수건을 14년쯤 쓰다 보니 나에 관해 알게 되는 게 있다. 나는 직접 해보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지구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로 손수건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내 앞에 쌓인 휴지가 테이블 위의 수저를 찾고, 술잔을 내려놓을 때 걸리적거려 시작한 손수건 쓰기는 내가 손수건 대신 사용하는 도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잦은 지, 그것들이 어떤 여파를 낳는지, 그래서 나는 어떤 생활을 하고 싶은지를 알게해줬다. 그렇게 우연히 술자리에서 #소심한지구방위대원은 탄생했다.






환경 보호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작년에 차를 산 것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줘 너무 잘했다고 까지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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