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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앝 Oct 04. 2021

주전자를 바라보며

물 끓이기 귀찮은 평소와 같은 어느 날

 이틀 째 물을 원하는 만큼 못 마시고 있다. 끓여뒀던 보리차가 정확히 이틀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임시방편으로 물이 고플 때마다 전기포트에 수돗물을 끓인 후 얼음으로 열기를 식혀 목을 축이고 있었는데 어제 점심시간에 마지막 얼음 한 알을 썼다. 미리미리 얼려둘 걸 후회하며 레인지 위에 올려진 거대 스테인리스 주전자로 시선을 옮겼다. 곁눈으로 흘기며 눈꺼풀을 끔뻑이는 데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또, 너를 채울 수 있을까? 수도꼭지만 틀어도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는 이 도시에서 물이 닳는 걸 긍긍하는 내 모습을 보고 혹자는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리수야. 그냥 마셔도 돼."

 맛이 없어.

 "그럼 다시 곡차를 만들어."

 귀찮아.

 "레인지가 끓여주는 거잖아. 버튼 두 번만 누르면 된다고."

 4L들이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우고, 레인지로 옮겨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고, 물이 식기 전에 알곡을 넣고, 너무 진하게 우러나기 전에 하지만 충분히 우려냈을 때 맞춰 걷어내야 한다고. 그뿐인 줄 알아? 물병 4개를 설거지해서 무거운 주전자를 들어 올려 채워 넣어야 해. 족히 1분은 4kg짜리 주전자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알아 알아. 주전자가 점점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문제는 주전자에서 물병으로 덜어낸 그것들을 다시 냉장고에 넣어야 하지. 아. 주전자를 씻는 걸 깜빡했네. 물을 끓인다는 건 단순히 뜨거운 열에 못 이겨 물 분자가 몸부림치는 순간을 맞는 것 그 이상이라고. 알아들어?

 "그럼 사 먹어."

 그걸 안 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잖아 멍청이!

 "말아. 그럼 그냥 그렇게 살아."


 해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살고 있다.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나의 방문 선생님들은 물컵에서 입을 뗄 때마다 칭찬해주신다.

 "어쩜 이렇게 부지런하세요. 선생님 댁에 오면 맛있는 보리차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선생님들은 당신이 선생님이면서 학생인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신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아니라 선생님이 되는 건 지도 모른다. 진짜 선생님이 되지 못한 나는 선생님답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척척하는 척하는 어른이 되었다.


 나도 생수를 먹을 줄 안다. 맛없는 생수. 문자의 뜻 그대로 아무런 맛이 안 나는 맹물. 엄마는 내가 수능을 치른 다음날부터 보리차 제조를 멈추셨다. 수능 다음날 렌털 정수기를 들고 서비스 센터 직원이 찾아왔고, 우리 가족은 딱 그날까지 남은 보리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아껴 먹었을 것이다. 정수기 물 맛이 별로라고 투정하는 나를 두고 엄마는 당장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라는 눈빛을 보내셨다.

 "누가 보리차 맛있는 줄 몰라? 물 끓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줄 알아?"

 나흘 전에 마지막으로 쓰고 널브러진 주전자를 보자니 그날 내가 했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부싯돌로 불을 지펴 만드는 것도 아니고, 레인지가 끓여주는 거잖아. 레버만 돌리면 된다고. 업보라는 건 이렇듯 전생과 내생에 관계없이 현생에도 들이닥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리고 몸을 편케 하는 쪽으로 더욱 쉽게 적응한다. 직접 끓인 맛있는 물을 먹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 맛없는 물을 먹는데 무리 없이 적응한다. 그래서 나도 적응했다. 독립을 하고 적당한 양의 생수를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하다가 정기 배송에 정착했다. 쿠팡은 나에게 매월 5일, 1L짜리 PET 36개를 문 앞에 배송해줬다. 1L x 36은 먹기도 좋고 운반하기도 좋은 딱 적당한 크기와 양이었다.


 플라스틱 소비량의 상당 부분은 일회용 포장재가 차지한다.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지난 2019년 12월에 발행한 보고서 <플라스틱 대한민국-일회용의 유혹>에 따르면 1분마다 트럭 한 대 분량의 플라스틱이 바다로 버려진다. 우리나라 바다에서 발견되는 쓰레기의 80%는 일회용 플라스틱 폐기물이다. 한국은 일회용 플라스틱을 많이 사용하는 나라 중 하나인데,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플라스틱 Top 3 품목인 생수 PET병, 일회용 플라스틱 컵, 일회용 비닐봉지 소비량 만으로도 전체 플라스틱 폐기물의 20%에 달한다. 한국인 1인은 평균적으로 한 해에 생수 PET병 96개, 일회용 플라스틱 컵 65개, 일회용 비닐봉지 460개를 소비한다. 3가지 품목을 더한 무게는 11.5kg이다. 무게? 비닐봉지에 무게가 있었다고? 놀랍게도 저 3가지 품목 중 비닐봉지가 9.2kg로 가장 많은 중량을 차지한다.


 1L x 36개 x 열두 달 = 432개의 PET병을 소비했던 나는 지옥에 갈 게 분명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실천들은 지옥에 안 가기 위함이 아니라 지옥에서 조금 더 편안한 형벌을 받기 위한 밑 작업이다. 이 무게를 나라 전체로 옮겨오면 대한민국은 3가지 품목만으로 586,500,000kg의 일회용 플라스틱 폐기물을 만든다. 재무 담당자가 아니고서야 한눈에 읽기 어려운 이 숫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20%, 5분의 1로 아직 우리가 얘기 나누지 못한 5분의 4가 남았다. 구체적인 숫자로 보니 천국에 못 가는 게 다행이다. 천국은 외로운 곳이 아닐까?


 우리는 매일 '플라스틱'이라고 이름표를 단 쓰레기통에 성실히 분리수거를 하지만 실제로 재활용되는 비율은 20% 안팎이다. 뭐라고? 내가 매월 36개씩 사들이는 그 통을 분리수거하려고 얼마나 무거운 귀찮음을 이겨내고 1층까지 내려갔는데 20%? 허탈한 수치다. 정규 교육과정의 위대함은 학창 시절을 벗어나야 알 수 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플라스틱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배웠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플라스틱이 만들어지는지 세세하게 기억할 순 없어도 몇 가지 단어는 떠올릴 수 있다. 석유, 화석연료, 합성,... 플라스틱은 석유와 화석연료를 화학적으로 합성한 물질이기 때문에 재활용하더라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각각의 목적에 맞게 합성한 재료가 다르므로, 원재료의 성질은 합성되어 변하였으므로 재활용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기존보다 더 낮은 품질의 제품이 되고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잃는다.


 남은 80% 귀신처럼 구천을 떠돈다. 자국의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나라는 재활용을 명목으로 일부 저소득 국가에 쓰레기를 수출한다. 어쩌면 그들은 쓰레기가 필요해서 수입하는  아닐까? 그럴 리가. 쓰레기가 좌표를 바꾼다고 금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라 폐기물을 폭탄처럼 돌리던 2019 어느 , 필리핀으로 불법 수출한 폐플라스틱의 일부가 평택항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뉴스는 어쩔  모르며 우왕좌왕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했으나, 우리의 관심은 금세 다른 데로 옮겨갔다. 누군가가 알아서  해결했겠거니. 플라스틱이  좋게 재활용이 되든 어쩐지 그랬을 것처럼 매립되거나 소각되든 궁극적으로 불가피한 오염을 발생시킨다. 소각이라. 석유를 태우면 뭐가 되는지도 우리는 배웠다. 자동차는 석유를 태워 굴러가는 기계다. 그리고 현대는  지구가 전기차와 수소차 개발에 힘을 쓰고 관련 주가가 치솟는 시대이다.


 나흘 전에 물을 끓였던 주전자를 아직 씻지 못했고 나는 목이 마르다. 물을 다시 끓이려면 주전자를 닦아야 한다. 마음이 답답해진 나는 바람이나 쐴 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을 눌렀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귀퉁이에 걸린 디지털 스크린에서 배달의민족 B마트 광고가 번쩍인다. 지금 핸드폰을 열고 30분이면 생수병을 배달받을 수 있다. 우선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환경 보호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차를 산 것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줘 너무 잘했다고 까지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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