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앝 Oct 11. 2021

내 이불은 빨강

여성인 당신만이 할 수 있는 환경보호, 생리컵

 계절의 변화는 지난 계절을 갈무리하게 한다. 여름 동안 내 몸을 감싸고, 흘린 땀을 받아내던 이불 옷을 빨았다. 건조대에 널기 전 펄럭! 하고 물기를 털었다. 남아있던 물방울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아. 오늘 날씨가 좋다. 가을이야 가을 하며 하얀 이불 위로 걸린 파랗고 선명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뽀얀 이불 한가운데 희미하게 번진 갈색 반점도 보았다. 이건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질 않네.

 

 내가 마지막으로 이불에 지도를 그린 건 약 5년 전이다. 그렇다. 어른도 때때로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 신체 조절 능력이 떨어져서라기보다는 조절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어서 그린다. 이제는 지도를 그리지 않아도 되는 나이에, 아침에 일어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엉덩이를 들어 요를 살피는 현상은 13세에서 50세 여성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잠옷과 팬티에는 커다란 대륙이, 바닥에 깔았던 시트에는 작은 섬나라들이 붉게 타들어 간다. 내 자궁. 밤새 집을 빨갛게 불태웠구나. 그리고 제때 세탁하지 못한 죄로 산화되어 이불에 거무죽죽한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요에 빨간 지도를 그린다는 건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전문가들은 2~3시간에 한 번씩 생리대를 교체하기를 권장한다. 흡수된 양이 적더라도 그렇다. 소량이라도 생리혈이 흡수된 생리대는 세균이 증식하기 쉽기 때문이다. 생리 주기 첫날부터 둘째 날까지는 굳이 3시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생리대가 묵직해진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우리는 다른 전문가들로부터 8시간 잠자기를 권장받지 않았던가? 간밤에 생리대를 3~4회는 교체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젯밤 이불에 실수했던 독자가 있다면 말씀드립니다. 그건 실수가 아니고, 당신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신세계를 만날 수 있는 탁월한 방안을 알려드릴게요.


 월경 주기 동안 우리는 하루 평균 6~8개의 생리대를, 한 주기에 40여 개의 생리대를 쓰레기통에 넣는다. 1년으로 확장하면 500여 개, 한 여성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평생토록 약 1만 5,000장의 생리대를 사용한다. 가장 흔하게 팔리는 16장짜리 중형(남성들이여, 소/중/대는 여성의 엉덩이 사이즈가 아닙니다.) 생리대 패키지는 스타벅스 조각 케이크 상자 크기와 비슷하다. 살면서 스타벅스 조각 케이크 상자 천 개만큼의 생리대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돈 주고. 어지러우니 패키지 속 생리대는 압축되어 있다는 것까진 생각하지 말자.


 한 달의 1/4을 눅눅하고, 축축하고, 흰 바지를 못 입고, 배를 앓고, 때때로 이불을 빨아야 하는 것도 어쩐지 억울한데 저 많은 양의 쓰레기를 지갑을 열어 샀다는 건 더 억울하다고 생각하던 중 생리컵을 만났다. 생리 주기가 낀 주말에도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 있다는 말에 고민 없이 쇼핑했다. 다만 내가 처음 생리컵을 만나던 5년 전에는 국내에는 제조하는 곳도 판매하는 곳도 없어서 해외 직구를 했다. 네덜란드, 미국, 호주 등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생리컵 브랜드와 종류는 우리나라의 생리대만큼이나 다양했다. 너무 많아서 고르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뭐야. 우리만 몰랐어!


  넘고 바다를 건너 생리컵이 도착한 이후로   내내  바지를 입고, 뽀송하고 쾌적한 아랫도리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잠들기 , 밤에 지도를 그릴까  자세를 고쳐 눕고 주말에 자다 깨어 화장실에 들른  다시 침대로 오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 외출할  꽃무늬가 그려진 누가 봐도 생리대가 들어있을  같은 주머니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몸속에 있는 생리컵이면 충분하다. 교체하고 싶을  나는 이것을  몸에서 빼내어 씻고 다시 집어넣을 것이다. 씻어서 다시 쓰기 때문에 스타벅스 조각 케이크 상자  개만큼의 쓰레기도 없다. 무엇보다 3 원을 들여 생리컵을 산후로 지난 5 동안 월경 용품에  영수증은 0원이다. (혹시 새어 나올까  걱정되는 당신이라면 작은 팬티라이너면 충분하다. 빨아 쓰는  생리대라면 더 좋다.) 나는 나를 살리고, 지구도 살리고, 지갑도 살렸다.


 내가 환경을 생각하며 하는 일은 대개 귀찮고, 번거롭고, 손이 많이 가고, 나를 어딘가 불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생리컵은 유일하게 환경을 위하면서도 나에게 심리적, 육체적, 경제적 자유를 주었다. 유일하게 편하고 손이 덜 간다. 첫 월경을 경험하는 어린이들에게 꼭 쥐여주고 싶은 물건이다. 더 나아가 생리대 구매에 들어가는 비용이 부담스러운 저소득 층, 개발도상국 청소년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다. 사람이 꼭 환경에 유해한 물건만 만드는 건 아니다.






환경 보호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차를 산 것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줘 너무 잘했다고 까지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봅니다.


소심한지구방위대의 다른 글은 매거진에서 보실 수 있어요.

여러 대원이 참여하는 매거진에서 각자의 소심한 실천을 지켜봐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