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use, 거절이 어려운 당신에게
학부 1년, 지금은 없어진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 인근 맥도널드 계산대 앞에서 긴 심호흡을 했던 1초가 생생하다. 당시 연애하던 짝꿍이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맥도널드에서 기다리면 그리 오겠다고 했다. 해외에 처음 와본 여행자처럼 계산대로 향하기 직전까지 주문할 메뉴를 주술 외우듯이 연습했었다. 기억이 있는 날 중, 주문이란 걸 직접 해본 최초의 날이었다.
"프렌치프라이 하나 주세요."
우려와 달리 연습을 많이 한 덕에 말을 더듬지도, 점원이 못 알아듣지도, 주문이 잘 못 들어가지도 않았다. 고작 이게 내가 20년 동안 두려워하던 거라니 조금 허탈하고, 약간 의기양양해졌다.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됐는데, 나 같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경계를 허무는 도전.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계산과 주문은 취조 같은 압박을 준다.
사무실 이사로 짐을 싸야 했던 어느 날, 내 짐만 3박스가 나왔다. 10명 남짓했던 팀의 다른 분들은 대체로 1박스, 많아야 2박스를 채울 뿐이었다.
"김선미 님은 뭐가 이렇게 많아?"
박스 안에는 유관부서나 우리 팀 동료들이 준 선물들이 엉켜있었다. 직접 써보니 너무 좋았더라는 마스크팩, 회사 PB 신제품 샘플 꾸러미, 두 개 사서 하나가 남았다는 사은품, 당신의 신입사원 시절에 정리해서 요긴하게 썼다는 업무노트, 해외여행지에서 사 온 에펠탑 모양의 열쇠고리 같은 것들. 주문도 심란한 사람에게 거절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그것들을 모아다가 버리지도 못하고 집에 가져가지도 못해서 회사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날이 되어서야 75L 들이 종량제 봉투에 모아 쓰레기통 옆에 세워두고 사원증을 반납했다. 시기를 유예했을 뿐 그것들의 운명은 역시 쓰레기통 행이었다.
일상 중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호의의 유혹을 받는다. 동료나 친구와 카페에 가면 채 거절할 겨를 없이 컵에 빨대가 꽂혀있다. 그 마음 씀이 어찌나 곱고 섬세한지 혹시나 먼지가 앉을까 봐 입술이 닿는 곳만 포장을 남겨놨다. 이런 배려를 어떤 말로 거절할 수 있을까. 음식점에 가면 반사적으로 수저 아래에 냅킨이 깔린다. 존중의 의미로 이런 예의가 생겼다는 걸 알기에 수저통이 내 곁에 있을 땐 나 또한 냅킨을 놓아주게 된다. 이걸 안 하면 상대방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오해받을까 걱정이 든다. 시장의 아주머니들 손놀림은 어찌나 빠른지 지갑을 찾는 찰나에 이미 비닐봉지에 고추, 깻잎, 오이를 각각 나눠 담아주셨다. 그래서 장바구니와 텀블러, 빨대, 손수건 등을 챙겨 나가서도 쓰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 많다. 휴지, 물티슈 같은 판촉물들은 꼭 굽은 허리를 한 어르신들이 나눠주고 계셔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마음이 어지럽다.
<나는 쓰레기 없이 살기로 했다(Zero Waste Home)>의 저자이자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비 존슨(Bea Johnson)은 쓰레기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 5R을 소개했다. 거절하기(Refuse), 줄이기(Reduce), 재사용하기(Reuse), 재활용하기(Recycle), 썩히기(Rot)로 구성된 R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 실천 중 첫 번째는 단연코 거절하기이다. 가장 쉽게 시도할 수 있고 그 효과는 크다. 정중한 거절이 만연해진다면 기본값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배달의 민족에서 일회용품 선택 사항이 3단계(가게 사장님께 직접 일회용품 거절의 메시지 남기기 -> 일회용품 거절을 선택하기 -> 일회용품 제공을 선택하기)로 변화하는걸 직접 경험한 바 있다. 카페에서 텀블러를 내미는 고객이 많아진다면 '일회용 잔, 필요하세요?', ‘개인 컵 사용하세요?’라고 물어보는 날이 올 것이다. 줄어든 수요만큼 일회용품 생산량도 낮아질 것이다.
다시 거절을 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 모두가 문법처럼 당연하게 행하는 호의를 홀로 베풀지 않을 생각을 하니 상대방에게 무심한 사람으로 여겨질까 두렵다. 공짜로 주는 것을 뭐라고 사양할까. 무슨 말을 보태서 무례하게 굴어볼까.
"저 장바구니 있어요."
"냅킨 없어도 괜찮아요?"
이 정도면 되려나. 에휴. 심난해.
환경 보호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차를 산 것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줘 너무 잘했다고 까지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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