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당신의 목소리를 찾고 있어
"어머, 이게 뭐야? 장난감같이 귀엽네."
"선미가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것 같아서 챙겨 왔어."
지난겨울, 칫솔을 한 자루 선물 받았다. 비누부터 이불까지 나이를 먹으면서 생필품을 선물 받는 일이 늘었다만 칫솔은 처음이었다. 나쁘지 않아. 아주 좋아. 대나무로 만든 칫솔의 촉감은 포근하고 보드라워서 오늘 아침까지 썼던 플라스틱 칫솔의 손잡이를 다시 쥐면 손이 얼어붙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일었다. 무엇보다 이 칫솔. 힙해 보인다.
MBTI 없이 나 자신을 소개할 수 없는 시대라는데, 취향이나 생각을 말하려면 목구멍에 거름망이 걸린 것처럼 정작 제일 크고 묵직한 건더기는 속에 남기고 우러난 국물만 넌지시 흘려보내는 나를 볼 때 내향성을 실감한다. 그러다 이렇게 관심사를 알아채 준 배려를 받고 나면 역시 떠벌려야 지식도 모이고 사랑도 느끼는 거야 하고 다시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준비되지 못한 말은 할 줄을 몰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서 이렇게 문장을 늘어놓았다 훔치기를 반복하며 하고 싶었던 말을 어렵사리 발견하는 처지지만 자신을 드러낼 때 배움이 모인다는 것쯤은 안다. 사람은 생각보다 순수하고 선량해서 애정 하는 그이에게 도움 되는 것이라면 무어라도 물어다 주고 싶고, 생각했던 대로 영리하고 아는 체하기를 좋아해서 내가 관심 두는 것이라면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리든 몸이든 자기 안에 든 걸 떠벌리고 물물교환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찬란했던 르네상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찾아왔고, IT의 성지는 모름지기 실리콘밸리와 판교이며, 돈은 자고로 월 스트리트와 상해로 흘러야 마땅하다.
이런 물건이 있다는 데 감탄한 건 잠시였다. 나는 근심도 근면하게 하는 ISFP니까. 나무로 만들어 땅에 묻어도 분해될 거라 생각하니 안심이다만 이것도 결국 자연을 베어 만든 것이 아니냐는 걱정에 친구는 그 우려를 잠시 내려놓으라고 했다. 대체 무얼 먹고 자라는지 비료는커녕 물도 덜 쓴다는 대나무의 성장 속도는 갓 태어난 골든 레트리버 같아서 하루에 1m도 자란다는 거다. 게다가 한 번 베고 나면 다시 심어야 하는 여타 목재와 달리 머리가 댕강 잘리고도 그 위에 다시 키를 키워서 친환경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는 게 친구의 변이었다. 100kg이 넘는 판다도 배불리 먹여 살리는 식물이니 그럴싸한 말이었다. 무엇보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모양새가 망설임이 많은 내 모습과 닮아서 썩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곧게 솟은 기개가 희망차지 않은가.
나는 가볍고 군더더기 없는 대나무 칫솔에 금세 마음을 빼앗겨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중 부부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로 집들이에 나서면서 대나무 칫솔 두 자루를 챙겨 가방에 찔러 넣었다. 어느 아침에 사이좋은 부부가 나란히 대나무 칫솔을 쥐고 양치를 하는 모습이 비치는 거울을 상상하니 흐뭇하고 그랬다.
"세상에, 이런 게 다 있어?"
몇 달 후 부부는 비슷한 품질에 더 저렴한 칫솔을 찾아서 내게 알려주었다. 1,500원보다도 더 싼 게 있다고? 대나무 칫솔은 그렇게 손에서 손으로 제 키만큼 뻗어 나갔다.
나의 첫 직장과 두 번째 직장은 화장품을 만들고 유통하는 곳이었는데, 시기마다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고객이 화려하고 과장된 포장에 거부감을 품기 시작하면서, 내용물에 미세 플라스틱이 있는지 살피면서 그때마다 기민하게 대응하고 싶어 했다. 뷰티 업계의 뿌리가 친환경과 거리가 멀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이직으로 업계를 이동해서 구체적인 고민의 내용이 달라지고도 회사는 언제나 소비자의 피드백에 굶주렸고 고객의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요구에 빠르게 응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무엇보다 고객에게 미움받기를 더할 것 없이 두려워했다. 제 아무리 주판을 튕기는데 베테랑인 그들도 고객이 등 돌리는 꼴은 못 보는 것이다. 소비자 없이는 기업의 존속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필요하지 않은 무엇이든 장바구니에 담지 않는 것이 환경을 위한 가장 쉬운 일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개월에 한 번씩 칫솔을 교체해야 할 때, 음식을 담을 무엇이라도 필요할 때 대나무로 만든 물건을 사는 게 옳은지 여전히 나는 확신이 없다. 내게 대나무 칫솔을 소개해준 친구도 몰랐던 무언가가 있을까 봐, 내가 공부하지 못한 자연을 향한 부작용이 있을까 봐 망설여진다. 이렇게 대나무로 만든 물건을 너도나도 탐하다가 대나무마저도 지구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난다. 물론 필요하다는 핑계로 근심을 누르겠지만. 그렇지만 시장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움직인다는 것, 내가 미워하는 물건을 만드는 공장엔 기업도 더는 기름칠하지 않을 거라는 것, 내가 찬양하는 무언가는 친구들도 눈여겨볼 거라는 것, 그게 아주 멋져 보인다면 더 빨리 눈에 띌 거라는 걸, 그리고 우리가 보내는 신호를 시장은 다시 놀라울 만큼 빠르게 알아차릴 거라는 데 믿음을 걸어본다.
가장 친한 친구 네 명이 비슷한 시기에 임신했다. 다가오는 12월에 둘, 내년 2월, 3월에 각각 한 명씩 새 생명이 탄생할 예정이다. 세상에 나올 아직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엄마는 커녕 아내도 못 되는 주제에 이상한 사명감이 차오른다. 잘 살아야 한다.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줄 방법이 요원하더라도, 오늘처럼 간간이 맑은 하늘을 보여줄 수 있도록.
환경 보호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차를 산 것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줘 잘했다고 까지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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