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F 웰컴 키트 종이접기를 하다가
하단에 이 글을 쓰게 만든 WWF 웰컴 키트 만들기 vlog가 있어요. 소심한지구방위대원들의 수다를 들어보세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어쩐지 공자님이 말했을 법한 이 구절은 놀랍게도 미국인도 안다. 심지어 유럽인도 안다. 중동 사람,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도 안다. 그냥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안다고 보면 된다.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이다. 선행은 자고로 아무도 모르게 해야 제맛이다. 착한 일을 했다고 제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어쩐지 졸부 냄새가 난다. 타인의 이목 없이는 아무도 도울 줄 모를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좋은 일 하고도 본전은커녕 빚만 지는 꼴이다. 이런 수지맞지 않는 일을 피하기 위해 선행은 범죄만큼 은밀하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개봉됐던 2017년, 주변에도 채식하는 친구들이 막 생겨났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다시 고기를 먹고 있다. 어쩌면 모두. 채식 인파가 늘던 그맘때, 술상 머리 앞에서 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학창 시절 자주 몰려가던 육전이 맛있는 집에서 동기들과 모였는데, 부록처럼 딸려오는 우거지 해장국에 자꾸만 손이 가는 가게였다. 한 녀석이 자기는 최근 육식을 않기로 했다며 시그니처 육전은 생략하고 부추전, 김치전으로 충분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업계 동향을 나누고 이직한 몇몇 선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회인 흉내 내기를 시작으로 자리는 무르익어 추억팔이로 향해갔다. 막걸리도 좀 들어갔겠다 목청들이 트이던 차에 우거지 해장국을 호록호록 마시던 채식이를 쳐다보며 맞은편 육식이가 볼륨을 높였다.
"야 인마 그거 소고기 우려서 만든 건데 그게 무슨 채식이냐."
채식이가 우거지 해장국이 소를 고아 만든 걸 몰라서였는지, 상황에 따라 육식을 허용하는 플렉시테리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30분쯤 지난 애매한 시간에 채식이는 먼저 일어났다.
뭘 좀 해보려는 사람들에게는 더 촘촘한 빗금이 그어진 잣대가 쥐어진다. 지나다 슬쩍 보고 훈수 두는 사람도 생기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쓴소리 듣기 십상이다. 해주는 말들이 구구절절 옳은 소리라 죄책감과 더불어 의욕이 꺾인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 뭐 잘났다고 유난을 떨었나 싶다. 나 자신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어떻게 볼까 싶어 이내 포기하기도 한다. 채식이는 그날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닥치고 조용히 파전이나 먹을 걸 생각하지 않았을까.
일말의 여지없이 2021년이 됐다. 코로나로 잃은 연말 분위기 덕에 지난겨울엔 '구세군 자선냄비서 수표 발견' 같은 훈훈한 뉴스도 없었다. 새해맞이 역시 어영부영 지나가는 바람에 아직 2020년을 못 보내주었다 해도 나무랄 이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달은 부지런히 지구 주변을 맴돌아 반가운 구정 연휴를 주고 갔다. 이번 주엔 작년 연말정산 결과가 반영되어 급여가 입금됐고, 다음 주면 입학 시즌이다. 이제 와 2021년을 맞을 준비가 덜 됐다 눙치려 들면 속없는 사람이 된다.
모든 이별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2020년을 놓아주는 나에게도 마땅한 사연이 있어야 한다. 동서양을 가를 것 없이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숭배한다. 언젠가 사내 교육으로 문제 해결 기법이라면서 5 Why 분석법이라는 걸 배운 적 있다. 왜라고 5번 물으면 답이 나온다나. 그래 한 번 물어보자. 오늘 늦잠을 잤다. 주말이라고 이렇게 늘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왜 늦잠을 잤을까? 어제 늦게 자서. 어제는 왜 늦게 잤을 까? 낮잠을 자서. 낮잠을 왜 잤을까? 하체 운동하느라 힘들어서. 하체 운동은 왜 힘들었을까? 공복에 운동해서. 왜 공복에 운동했을까? 젠장. 어제 늦잠 자서. 젠장. 원점이잖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류는 아직도 지구가 어떻게 생겨난 건지 밝혀내느라 정신이 없다. 그냥이라는 말은 허무하다. 그래서 나의 고달팠던 2020년도 여느 해와 같이 눈가에 주름만 남기고 그냥 지나갔다고 하기 싫다. 온 우주가 내게 어떤 문제를 심어주어 그것을 풀이하느라 바빴다고 해가 다 지나서라도 의미부여 하고 싶다.
2021년에 들어서면서 WWF(국제 자연 기금)와 그린피스에 정기후원을 시작했다.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다. 결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말하니 내내 고민했던 것 같은데, 일 년에 한두 번 눈 깜빡이는 시간만큼 했다. 그저 화가 난 줄 알았던 마음에 상처가 파여 있었다는 걸 후원을 재개하고 알았다. 2013년, 공유 오빠가 유니세프 홍보대사 활동하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정기 기부를 시작했었다. 돌이켜보니 취업 준비에 난항이던 때라 착한 일을 하면 취업도 뽀갤 수 있지 않을까 미신 같은 사심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때, 옥스팜과 더불어 UN 등의 국제기구들이 추문에 휩싸였다. 그중 유니세프도 포함된 걸 보고 왼손 몰래 하던 기부도 중단됐다. 왜 다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2020년 내내 지구를 위로할 방법을 고심하다가 2021년과 동시에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거짓말을 토하듯이 뱉어낼지도 모른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고, 물을 끓여 먹기 시작했고, 주머니엔 손수건이 있고, 배달음식은 지양한다. 누군가 왜냐고 물으면 지구를 위해서라고 말을 하고 다니긴 하는데 이게 진짜 내 본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멋있어 보여서 인 것도 같고, 사실은 텀블러가 예뻐서인 것도 같고, 엄마가 끓여주던 보리차가 그리워서 인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텀블러는 자주 두고 나오고, 주말이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실수인 척 배달의 민족이 된다. 그리고 또 누군가 왜 #소심한지구방위대냐 물으면 지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외롭지 않게,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이 되고 싶다는 방금 만들어낸 그럴듯한 이유를 답할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몰라서 좋은 게 뭐가 있을까. 오른손이 하던 일을 왼손도 하고 있어서 유별날 것 없으면, 그래서 마주쳤을 때 반갑고 신난다면 더 좋지 않나.
환경 보호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작년에 차를 산 것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줘 너무 잘했다고 까지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소심하게 목소리를 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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