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 카메라와 어이없음의 입꼬리

맑은 날의 안양천 산책

by 시드업리프터

흐리고 비가 오던 가을날씨가 초겨울로 들어섰다. 찬 음식에 찬 사람을 쐬었더니 살짝 감기 직전의 느낌이 오는데 이럴 때를 잘 이겨내야 한다. 감기 절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 8월에 냉방병으로 너무 심하게 앓았으니까.

날씨도 맑게 개었고 내 마음도 맑게 개었다. 아니다, 그래 아직 진행 중이니까 ‘아직 까지는’이란 말이 내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데 더 정확할 것이다. 아직 헤어진 지 한 달도 채 안 됐으니까. 이것저것 손을 뻗어봐도 커리어가 잘 안 풀리기에 이직 준비도 멈추고 해보고 싶었던 자격증과 마음의 휴식에 집중하고 있다. 커리어 공백 스스로 용납할 수 없던 시기도 있었음에도 지금은 공백기가 어떻든 부담스러운 나이 든 어쩌든 일단 멈추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왜냐면 진짜 잘 안되고 패배감만 짙어졌으니까... 당장병 중기에 해당하는 나로선 불안이 언제 또 나를 뒤덮을지 모르지만, 당장의 결정은 그렇다. 커리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시도하지 않기로. 그래도 의욕만큼은 넘쳐나기에 한 주의 계획표를 일요일에 짰고 오늘부터 잘 지키기 위해 짐을 쌌다. 아침에는 2년 넘게 지키고 있는 영어 독해 공부를 했고 맛있는 볶음밥을 해먹은 뒤 카페에 작업하려 나갈 준비가 됐다.


그러다 눈앞에 걸린 게 바로 홀가 카메라. 까만 토이 카메라인데 필름 감성으로 담아주는 작고 귀여운 장난감 카메라이다. 제 값만큼 쓰임을 못하고 살아왔던 터라 가을 날씨를 아름답게 담아보려 한다. 자연채광도 좋고 사무실을 멀찍이 벗어나 이런 탄력적인 생활을 한다는 게 벅찬데 이런 여유 있는 생활 중에 필름 감성을 담는 일이 얼마나 신나던지.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이 홀라당 날아가 버려 1장만 남은 적 있었고 건전지를 워낙 빠르게 잡아먹는 탓에 빨리 찍고 빨리 끄고 결정을 빨리빨리 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살짝 있다. 뭐든 어떠랴. 이렇게 여유 있을 때에는 여유를 즐기는 수밖에. 건전지를 끼워 넣고 카페로 출발했다.


안양천에는 따뜻한 볕이 한창이었다. 와 진짜 맑은 하늘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겨울 날씨라 코 끝이 시리긴 해도 진짜 올 것이 왔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알 수 있는 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내 방 창문에서 매일 보던 풍경인데도 굳이 홀가카메라로 담고 싶었고 내가 늘 걷던 안양천도 오늘은 필름카메라 감성으로 담아내고 싶어 카메라를 ON.


어랏?! 그런데 카메라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건전지를 뺏다가 다시 꽂아봤는데도 카메라는 방전된 상태인지 반응이 없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된 것 마냥 이 전자기기가 나에게 당황스러움을 한 움큼 쥐어다 줬는데, 바로 카메라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ON상태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부터 외출을 할지 말지 망설이면서 건전지를 뺏다 끼우기를 반복하면서 나간 것 같은데…아이고야 이미 안양천으로 나와버린 나는 황당함과 어이없음에 허허실실 웃기만 했다.


원래 이렇게 헐렁한 일이 종종 있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나사 빠진 경험과 혼자 허허실실 웃는 거 진짜 오랜만이었다. 왜냐하면 뭐든지 철두철미한 과거 그 사람(이제는 전 남자 친구)은 내가 실수할 때마다 나중에 결혼해서 같이 살면 이 모습 어떡하냐 너무 덜렁대는 거 아니냐고 지적했는데, 내가 이 실수를 할 때 그렇다고 빈도가 높았던 것도 아니지만 내 앞에서 매번 혀를 끌끌 찼다. 자연스레 눈치를 봤고 가볍게 털 수 있는 나의 헐렁한 모습들에 아, 숨겨야 돼. 아 들키면 안 돼. 아 이거 왜 이러지? 내가 문제인가? 하는 것이었다. 실수는 더 튀어나왔고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이제는 옆에 눈치 볼 사람도 없고 헐렁한 모습 그 자체로도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어진 지금이 훨씬 낫다. 마음이 편하다.

가을과 초겨울의 사이에서 공기가 정말 쾌청함 그 자체였다. 바람은 찬데 공기는 참 기분 좋았다. 카메라는 손도 못 대지만 여전히 목에 주렁주렁 걸고 안양천을 걸었다. 카페로 가는 20분. 근데 그러고 보니 내 입꼬리가 올라가 있구나.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나는 입꼬리가 축 쳐지고 웃을 일이 없어서 무표정으로 지내다시피 했는데 이별이 있기 전에는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 얼굴이었던 사람이다. 오늘 바로 지금, 자연스럽게 올라가있구나 나의 입 꼬리.

그러고 보면 내가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 올해, 그리고 지금 당장 무기력하지 않고 당장병에 걸려 뭐든 더 해 보려 하고, 더 노력하고, 안되면 돌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와중이라 회복 탄력성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내 이름표 옆에 찰싹 붙여둬도 될 만큼 내가 이만큼 강점이 있는가 보다. 쓰러지더라도 금세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추진력이 있는 사람. 홀가카메라 때문에 어이없는 웃음을 웃다가 스쳐간 오늘의 생각. 꼭 일기장에 적고 자아가 작아질 때마다 기억해야지.


ps. 24시간 뒤 홀가 카메라가 방전된 것이 아니라, 건전지를 거꾸로 끼워서 안 켜졌다는 걸 알게됐다. 또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다행이야, 홀가 카메라가 살아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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