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님의 어줍짢은 위로

돈을 꼭 잘버는 사람이 이상형일 필요는 없잖아요

by 시드업리프터

얼마 전 친구들과 저녁에 술 한잔 걸쳤다. 1차는 분위기 좋은 양식집에서 와인 한 잔 하고 2차는 달달한 사케와 방어를 즐겼는데 참 맛 좋았다. 슬슬 연말이 다가오니 모임을 시작하는 무리들이 많을 것 같은데 과연 내 친구들은 모임을 가질지 아닐지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놀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떠드는 시간이 좋은데 주변에서는 아이에게 집중하거나 혹은 일이 너무 바빠서 시간을 못 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하나하나 약속이 잡힐 때는 소중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서 즐긴다. 친구들이 모임을 자주 열어줬으면 좋겠다.


월요일인데도 거하게 술을 걸쳤는데 “야! 그래! 짠하자!” 하고 힘차게 잔을 든 순간 나는 너무 당황했다. 벌써 추가로 시킨 술 한 병이 끝나고 만 것이다. 분명 10시에는 일어나자고 했던 내가 11시가 다되어 가는데 술이 없어서 아쉬워하는 꼴이란. 어쨌거나 우리에게 내일도 살아내야 하는 나이가 됐으니 택시를 잡았다.

늘 이 친구와는 같은 방향이라 택시를 같이 탔는데 한결 같이 연애 조언을 해준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원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꼭 지식을 전달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매번 그렇듯 잠자코 듣다가 가끔은 묻는 말에 대꾸를 하곤 했다.


이 친구는 연애관이 뚜렷한 편인데, 남들이 말하는 평균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나는 연애에도 사람마다 다양한 기준이 있음에 공감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어준다. 근데 그 친구가 말하는 데 집중하면 택시 안에서는 목소리가 꼭 커진다.

술 집에서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는 주변에서 아무도 안 들으니까 우리끼리 선 넘는 이야기든, 야한 이야기든 거리낌 없다고 생각되는데 택시 아저씨 앞에서는 다르다. 그 친구가 내리고 나면 택시아저씨와 단 둘이 남게 되는 상황이 싫어서, 나도 그 친구의 연애상담에 내 이야기를 오픈하기가 꺼려지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그 친구의 과하게 오픈된 대화에 원치 않게 듣게 된 택시아저씨는 내 친구가 내리고 단 둘이 남겨지자마자 말을 걸어왔다.


“손님, 잠든 거 아니죠? 그런데 저 사람 남자친구인가요? 저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하하하하하하하. 저항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가씨는 오늘 내가 비록 처음 봤지만, 목소리도 예쁘시고 인성도 좋아 보이고 참해 보이는 데, 저 남자는 아주 철이 없네요. 저런 남자를 만나면 안 되는 거예요.”


선을 넘어도 아주 넘은 발언이었다. 기사님은 엘리베이터 스피치 평가자처럼 저 친구의 단점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데 이러나저러나 나는 술기운에 그냥 듣기만 했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이, 그래 아저씨도 그냥 배설하시고 저도 그냥 넘기겠습니다. 아, 그런데 칭찬은 기억 속에 넣어가지고 가겠습니다. 땡큐!


“돈 잘 버는 직장 다니는 남자 구하세요. 왜 요즘 텔레비전에 주가 한창 높은 거기 그 대기업 있잖아요. 돈 잘 벌어다 주는 사람 만나면 돼~ 아가씨는 예쁘니까 만날 수 있어. 내 아들이 34살이에요. 전문대 나왔는데 지금은 건실한 회사 다니면서 남들 못지않게 돈 잘 벌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 이놈이 장가를 갈 생각이 없어요. 답답한 놈~ 내 조카는 그 대기업에 다니는 데, 27살에 사내부부로 결혼했어요. 둘 다 얼마나 돈 잘 버는지 알아요? 연봉이 N억이나 하니까 집 바로 사가지고 지금 얼마나 예쁘게 사는지 몰라.”


아, 술이 확 깼다. 기사님의 넓은 오지랖으로 펼친 넋두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가정에다 돈을 잘 벌어다 주는 사람이 누가 싫겠냐만은, 아저씨 제가 그 회사 사람하고 헤어졌거든요? 아저씨한테 받은 칭찬 취소요. 술기운에 그냥저냥 듣고 넘기려 했던 기사님의 말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할 말은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도 이제는 그 대기업에 다니는..”


“기사님, 거기 회사 다니는 사람하고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돈 잘 벌어다 주는 사람이어도 저랑 안 맞는 사람이면 소용없어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가 봐요. 기사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헤어진 것 때문에 속상해하니까 친구들이 오늘 월요일인데도 퇴근하고 나와서 저를 위로해 준 자리거든요. 아까 아저씨가 철없다고 한 그 친구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교 나와서 멀쩡하게 좋은 회사 다니니까 잘난 소리 하면서 자신감 있게 사는 거라고요.”


기사님은 말을 돌렸다. “요즘 남자들이 문제다. 여자들이 결혼해 준다고 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데 헤어지다니 문제가 많다. 아가씨는 예쁘니까 좋은 사람 잘 만날 거다. 딱 보니까 인성이 좋아 보이는 데 그 남자가 아가씨를 놓친 거다 안타깝다. 아이고 무슨 일로 헤어졌을까 하면서”


기사님이 딸뻘 아들뻘인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고 원치 않는 잔소리를 하신 것에 대하여 스스로 어쭙잖은 위로를 하시며 수습하셨다. 이 날 따라 택시 안에서 돌아오는 길은 꾸불꾸불했고 몸이 좌우로 휘청휘청거려서 몹시 불편했다.

요즘 별 일 다 있다의 ‘별’이 내 인생에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는데 오늘도 택시 기사님과 별일이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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