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침에 미술관 가본 사람

책<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by 시드업리프터

미술과 예술하면 귀가 쫑긋, 눈이 휘둥그레지는 편이다. 회사에 다닐 적에는 오후 반차를 내고 미술전시 보러 가는 게 연말 분위기를 보내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퇴사하고 5개의 전시를 연속으로 가려고 큰맘 먹었다가 절반만 지켰다. 넘치는 의욕에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내는 게 내 스타일이니깐.

이 책이 나온 지 한참 됐을 때에도 내 시야에 단번에 들어왔는데 바로 미술 때문이었다. 인생 버킷리스트에도 언젠가 런던의 테이트브리튼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자원봉사하고 싶다는 걸 한 줄 넣었는데, 실제 큐레이터 직업을 가졌던 친구가 그 어려운 걸 왜 굳이 봉사까지 하면서 생고생하냐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미술을 매일매일 가까이서 즐기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 책을 펼치기 전에 나도 시드니에서 한 NGO 갤러리에서 공간 매니저로 일했던 적 있다. 몇 주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2주에 한 번씩 오픈과 클로징을 하는 전시 계약부터 철수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했던 적 있다. 아침에 혼자 갤러리 문을 열고 모든 세팅을 마치면, 한 시간쯤 뒤에 레슬리 관장님이 출근했다.

뒤이어 근무를 마치는 6시에 퇴근할 때 레슬리 관장님은 9시에 갤러리 문을 닫았다. 전시 오프닝이 일주일 한번 꼴로 있었는데 그 시기 아니면 언제 또 미술 전시를 즐기냐는 생각으로 자발적 야근과 샴페인을 즐겼던 추억이 떠올랐다. 취직하면 직장생활만 반복할 것 같은 내 인생에서, 그때는 마치 아티스트 매니저가 된 것처럼 자유분방한 그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그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해본 것들이다.


그래서 주마등처럼 그때 기억이 스쳐갔는데, 브링리 작가는 글로벌 TOP에 속하면 뉴욕 메트 박물관의 경비원이라니 스케일이 엄청나다.


69p. 오랫동안 나는 뉴욕의 훌륭한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봐왔다.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이 아니라 구석마다 경계를 늘 추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들 말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면 어떨까?

119p. 이 거대해 보이는 기관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메트는 2백만 개가 넘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 브링리도 미술과 친숙하고 미술을 매일 가까이할 수 있는 직업으로 메트 박물관 경비원을 떠올렸을 것이다. 내심 부러웠다. 나도 살면서 이런 기회가 한번 올 수 있을까? 버킷리스트에 런던 큐레이터를 적었지만 허황된 꿈인 것을 나도 알기 때문에 그걸 대신 실현한 브링리가 부러울 수밖에.


90p. 딱 1분 자겠다고 마음먹고 마무리하기를 기다리며 내가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드문 의무를 띠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이 사업가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나에게는 앞으로 나가야할 일도 없고, 추진할 프로젝트도 없고, 지향하는 미래도 없다. 이 일을 앞으로 30년 동안 한다 해도 아무런 발전이 없으리라는 이야기다. (중략) 사업가가 마침내 통화를 마치자 모든 것이 평화를 되찾았고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 매일 같은 그곳에 머무는 사람은 1분이라도 먼저 자리를 뜨고 싶어 하고 반대로, 관광객처럼 초행자라면 1분만이라도 늦게 나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기적인 사업가의 비매너 행동이었겠지만, 스페인 말라가의 히브랄파로 성이 문을 닫기 직전에 도착해서 경비원에게 뽀르파보르를 외치며, 15분의 시간을 받아낸 것도 같은 마음이렸다. 유럽여행 추억이 제법 다가왔다. 경비원은 빨리 퇴근하고 쉬고 싶었을 텐데 나 같은 극성 관광객이 귀찮았을 것이다. 그분이 양보한 시간과 배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생생히 떠올리는 추억이 됐지 않은가!


178p. 사실 내 직업을 좋아할 뿐 아니라 내가 그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에 화가 난다. 이렇게 평화적이고 정직한 일에서 흠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바보 같으며, 심지어 배신 행위라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183p. 소위 비숙련직의 큰 장점은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데 세상에는 대접받는 직업과 그렇지 못한 직업이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사람은 대단한 회사의 계급장을 떼고 메트 박물관의 경비원이 됐지만 관람객들은 그것 조차 알지 못한다. 난도가 낮은 경비직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낮은 학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모자라게 산 것도 아닌데 막무가내로 자기가 보는 시선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매우 무례해 보인다. 남은 함부로 판단하는 게 아닌데! 최근 나도 타인으로부터 마음껏 재단당하는 시선을 느꼈기에 남일 같이 않게 느껴졌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그런 사람은 자기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살 것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태도도 필요하다.


250p.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다시금 아메리카 회화 전시실에 배치되는 아침이면 벽에 걸린 그림들은 활력이 없고 그저 따분하게 보인다. 그림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 4년째 메트 박물관에서 일하는 브링리의 마음이 변하는 심리적 과정이 이 책에 모두 담겨있었다. 재미가 쏠쏠하다. 거룩하고 기대감 높은 일의 시작부터 지루함을 느끼고 이내 성장을 위해 회사를 떠나는 순간까지 모두 담겨있다. 브링리도 메트 박물관도 가본 적 없지만, 생생하게 브링리의 시선에서 책을 읽어갔다. 아저씨 나도 그런 적 있어도, 나도 그래요. 공감을 하면서.


322p. 가능하면 미술관이 조용한 아침에 오세요.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하고도 심지어 경비원들하고도 말을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면 눈을 크게 뜨고 끈기를 가지고 전체적인 존재감과 완전함뿐 아니라 상세한 디테일을 발견할만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세요.

: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었다. 이건 갤러리를 담당해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TAP 갤러리에서 일할 때,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 1층과 2층까지 조명을 빠짐없이 켰을 때, 나를 반겨주는 움직이지 않는 액자들. 그 그림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반가웠다. 말없이 그림을 보고 느끼려 해도 딱히 느껴지는 바는 없지만 그 그림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아무 생각 없어지고, 채색한 그림으로 내 시선을 가득 채우는 것 자체가 좋았고 행복했다. 스스로에게 시간을 허락했던 그때의 추억이 브링리의 체험 삶의 현장에서 온전하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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