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를 갭이어로 볼 수 있는 용기

책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by 시드업리프터

본격적으로 쉬기 시작하면서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갭이어와 커리어의 단절 사이에서 그 시간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건데 덥석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제작자가 엮은 글이라 그 형식의 디테일이 꽤 돋보였다. 신기하게 인서트 컷으로 보여주는 페이지, 인상적인 문장을 따로 적은 것부터가 책의 구성과 짜임새가 콘셉트가 확실하다고 느꼈다.


작가도 커리어의 자발적 단절과 공백 상태를 처음에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고 일터로 다시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혼란한 감정이 보였다. 그래서 내내 공감이 됐다. 그런데 이게 갭이어라는 관점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또 이게 당사자가 선택을 한 행위의 결과라는 주체적인 행위가 드러나는 단어기 때문에, 참으로 갖다 쓰기 좋은 단어다. 나도 커리어를 점령할 때 꼭 그리 말하겠다. 갭이어.


103p. 나의 한계를 알고, 동시에 내가 기어코 잘 해낼 일과 물러설 일을 고를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결국은 못 해내는 일이 있다는 것을. 무한정 달리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꽤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 일 욕심을 크게 가져본 자만이 안다. 내가 일에 빠져서 좋아해서 크게 몰입할 뿐이지 일을 빼어나게 잘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 동료의 일잘러 피드백과 스스로가 느끼는 셀프 일잘러 느낌의 괴리감은 크다는 것.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인지부조화가 클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런 어깨뽕이 올라간 상태에서 일을 처참하게 망쳐버렸을 때, 또 팀 워크가 완전하게 실패로 꼬여버려 일못러가 될 때의 자존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마치 일이 나를 키워왔던 것처럼 살이 에리는 것 같다.


112p.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일을 누가 더 잘하느냐가 아니라, 의외로 문제가 생겼을 때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 그 차이가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은 실패 앞에 받는 충격의 정도가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패의 횟수가 많다는 것은 경험의 콘텐츠가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ㅡ 전미경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지와인)

: 실패를 많이 해서 경험과 개선점, 회고와 고민을 수없이 많이 해봤다는 건설적인 정의. 그래 나 뿌리가 튼튼해지고 있어.


162p. 다시 트랙 위에 올라가 예전처럼 열렬히 뛰게 되어도, 한동안 지쳐서 쉬어야만 했던 지금의 나를 자랑스러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낸, 소중한 이야기를 나눠준 동료들 역시 앞으로도 계속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애씀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할 때 우리는 또다시 열렬히 뛸 수 있는 에너지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 그래 맞아. 힘들었을 땐 힘들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 그때의 힘듦과 고통 덕분에 지금의 내가 쌓여온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마지않아야 한다는 것. 한 번 더 나 스스로를 감쌀 수 있는 의지가 불끈 솟아오르는 문장이다.


178p. Q. 갭이어를 준비하는 여정중 마음 준비를 하는 게 가장 어려웠나 봐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올 자리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A. 맞아요. 내가 돌아올 회사가 있을까? 돌아올 자리이자 밥벌이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어요. 이런 케이스 스터디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가 아니어도 되는 삶을 찾고 싶어서 갭이어를 가지려던 건데 저는 자꾸 회사로 돌아올 삶을 찾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원이라는 자아를 과감히 내려놨어요.

: 사실 회사원이란 타이틀만 내려놓으면 진짜 단순해질 일 구하기일 텐데, 아 열렬히 공감이 된다. 회사원/ 상향지원이라는 점에서 커리어 공백은 고통스러운 현실인 것. 회사원 면접관이 바라보는 갭이어(부정적)와 진짜로 회사를 떠났던 자가 말하는 갭이어(긍정적)에는 진짜 갭이 있다. 예를 들면, 근속에 대한 리스크나 회사 로열티에 대한 리스크랄까.. 시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실이다. 부정할 수 없다.


183p. 내 시간과 선택에 100퍼센트 책임져야 한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무섭고 또 무겁다. 조직에 속했을 때는 회사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8시간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 16시간 동안 내가 누리는 자유와 안정감은 오로지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역시 회사의 기반 위에 있었다. 퇴사 후 돈을 쓰는 것만큼 두려웠던 것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었다. 돈을 쓰든 시간을 쓰든 스스로에게 교훈을 남기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무소속이 주는 자유와 책임에 압도되어 내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 결국 번아웃으로 터져버렸던 것 같다.

: 하.. 마음을 후벼 파는 작가의 말이다. 하… 맞아 회사는 남의 일이라서 On/ Off가 가능해 보였는데 프리랜서를 하면 24시간이 모두 화폐 가치 같고 그렇다. 프리랜서일수록 워라밸과 루틴에 아주 철저하게 경계를 세워두지 않으면 워커홀릭과 회사원 시절일 때의 월급 초과 달성이라는 마약 같은 성취감에 내적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가니까


184p. 두려움 때문에 또 하루 종일 스마트 스토어 상품 페이지 쓰는 일에 매달리고, 하루 종일 유튜브 영상만 제작하다 보면 수입은 많아져요. 그런데 이렇게 일을 많이 하려고 퇴사한 건 아닌데, 이러려고 우리가 갭이어를 가지는 건 아닌데 하고 정신이 들어요. 일종의 갭이어의 워라밸. 생활을 위한 시간과 나를 위한 시간의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고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에요. 나만의 페이스를 찾는 데에만 석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 앗! 바로 내가 한 말과 같다


216p. 일과 삶에서 나름 큰 도전을 하고 싶으면서도 가장 고민이 많이 됐던 게 내가 제로가 되는 것이 아닐까였는데 아무것도 없어진 게 없어요. 그 불안함이 사라지니까 정말 삶이 달라졌어요.

: 이 말도 나의 뇌를 크게 때렸다. 지금의 커리어 공백 상태가 내가 이룬 모든 것이 0이 아닌데, X축과 Y축으로만 봤을 때 나는 Y축으로는 쭉 쌓여있는 내 키만큼의 지점에 서 있는 건데 X축만 보고 단순히 0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너무 과하게 깎아내렸던 지난주.. 맞아 나의 모든 경험은 이미 몸 안에 뇌 안에 행동과 말과 가치관 안에 녹아들어 있고 새로운 것을 한다고 해서 제로베이스는 아니라는 점.


239p. 여전히 열렬한 마음으로 일했던 과거의 나에 비해 에너지도 역량도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종종 우울감이 든다. 나는 결국 회복될 수 없는 것일까? 자존감이 낮아진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몸과 생각이 바뀐 거예요. 에너지, 집중력, 영민함이 예전만 못하다면 그만큼 다른 것으로 채워졌을 게 분명해요. 저도 가끔 열정 넘치던 과거의 저를 생각하면서 나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지만 이렇게 살아도 됩디다. 노트에 적어둔 상담 선생님의 말을 자주 찾아 읽었다.

: 아하.. 나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모든 게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꼭꼭. 나도 근로 의욕이 샘솟던 초년생 시절과 비교했을 때 예전 같지 않음에 씁쓸했었다. 워커홀릭 이면 이 캐릭터 유지해야 한 하나 하는 내적 갈등. 그러나 그런 게 아니다. 나를 최대한 보호하고 오랫동안 일하려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달라졌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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