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오는 환자 중에도, 의료진 중에도 당연히 성소수자가 있죠.”
병원에 오는 환자 중에도, 의료진 중에도 당연히 성소수자가 있죠. 생각보다 많죠. 특히 간호사 중엔 ‘부치’(Butch, 복장·말투·몸짓 등에서 소위 남성적인 방식으로 성별표현을 하고 이를 편안하게 느끼는 레즈비언) 스타일 간호사도 눈에 띄어요. 제 전애인도 부치 간호사였어요.
그렇다.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울버린 제외)은 병원에 간다. 아픈 게 무섭고 진료비가 무섭지만 그래도 간다. 병원 가기를 미루면 결국 더 많이 아프고 더 큰 돈이 깨지기 때문에. 하지만 이가 썩어 치과를 찾을 때, 감기에 걸려 동네 이비인후과에 갈 때, 밤중에 갑자기 아파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을 때도 나를 치료하고 간호하는 의료진이 성소수자일 거란 생각을 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QiC 첫 인터뷰이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공간, 병원에서 근무하는 퀴어 간호사 게일(나이팅게일과 게일 루빈의 게일)님이다.
저는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6년 차 간호사입니다. 제 성적 지향은... 그냥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라고 하기엔 좀 불편하고요, 하나 이상의 성별에 끌린다는 뜻의 바이 플러스로 하겠습니다.
게일에 따르면 의료진 중에 성소수자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고 한다. 현재 게일이 일하고 있는 병원의 전체 직원은 약 1만 명, 간호사는 3000명이다. 전체 인구의 약 3%가 성소수자라고 가정하면 확률상 게일의 병원 전체 직원 중 300명, 간호사 중에선 90명이 성소수자인 셈이다.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도 물론 성소수자가 있다. 게일네 병원의 응급실에 방문하는 신규 환자는 하루 평균 150명. 확률 상 이 중 4~5명은 성소수자다.
게일은 병원에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가 있는데도 동료 의료인들 사이에서 ‘우리 병원에 게이 간호사가 있을 거야’, ‘레즈비언 의사가 있을 거야’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틈을 타서 사내연애를 하기에 좋은 환경 아니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며 “내 전 애인이자 처음으로 사귄 동성 애인도 같은 병원 동료 간호사였다”고 답했다. 심지어 게일의 전 애인은 전형적인 티부 스타일이었는데도 아무도 둘이 사귄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고 했다.
“티부 애인을 만나면서도 ‘내가 성소수자다’라는 자각은 없었어요. 그냥 나는 얘만 좋아하는 거지. 제가 바이인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한 3년 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세상은 이성애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많은 바이들이 저랑 비슷할 것 같아요. 논모노섹슈얼(Non-Monosexual, 하나 이상의 성별에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다들 늦는 것 같아요. 물론 중학생 때, 사춘기 때 처음 자신의 바이 정체성을 깨닫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체로 20대 이후에 첫 동성애인을 만나면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자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바이는 남자도 여자도 사귈 수 있으니 연애 상대도 두 배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라는 편견을 많이 받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바이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성애자 남성이 몇 명이나 될까요? 또 레즈비언 사회 내에도 바이 혐오(바이는 연애는 여자랑 하다가 꼭 남자한테 시집가더라)가 있는데 이런 편견이 없는 여성이 몇 명이나 될까요? 이런 걸 다 따져보면 오히려 레즈비언이나 게이보다 바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더 적은건 아닌지.”
“십 대 때 정체성 혼란을 겪지는 않았지만 늦게 정체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작년이 저에겐 나름 질풍노도의 시기였어요. 내가 바이 플러스인 건 그냥 받아들였는데 ‘바이 플러스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고민은 작년에 많이 했어요. 내가 이성애자가 아닌 건 확실한데 바이 플러스로 살아가려면 퀴어 사회화를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바이 혐오를 나도 가지고 있는 상태였어요. ‘내가 바이 플러스니까 마음 맞는 남자만 만나려고 노력해서 남자랑 결혼하면 이상한 눈초리 받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같은 생각이요. 결혼한 상태면 커밍아웃하는 것도 더 쉬울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 또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어요.”
게일 님은 팸이에요 부치에요? 바이에요?
게일이 자신을 처음 성소수자라고 생각한 건 삼 년 전쯤이다. 하지만 그때도 자신이 바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주변에서 “게일 님은 팸(femme, 복장, 말투, 몸짓 등에서 소위 여성적인 성별표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이를 편하게 인식하는 레즈비언)이에요 부치에요? 바이에요?”라고 물어볼 때도 그냥 바이에 제일 가깝다고만 대답했다.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를 바이라고 부르기에는 불편한 감이 있어요. 특히 제가 좀 늦게 안 편이니까 스무 살의 제가 생각했을 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제 인생이 흘러왔고, 앞으로 내가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에 제 정체성을 똑 부러지게 이거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도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는 젠더퀴어(Genderqueer,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성별 구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여성도 남성도 아닌 다른 성별정체성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이들을 두루 아울러 가리키는 말)라서 더 젠더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어요.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좋아한다는 의미의 바이섹슈얼보다 하나 이상의 성별에 끌린다는 의미의 바이섹슈얼, 바이 플러스로 저를 설명하고 싶어요.”
“병원에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 양성환자가 오면 모든 환자를 게이라고 생각하거나, 면회 오는 사람들도 다 게이라고 생각할 때. 당연히 모든 HIV 환자가 게이일 리가 없고 의료인이라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 텐데 혐오 발언하는 걸 보고 있으면 동료 의료인으로서 부끄럽죠. HIV 감염인과 성소수자가 꼭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최근 보라매병원 치과에서 HIV 감염인을 진료할 때 치과 의자를 비닐로 꽁꽁 싸매고 과잉 대응한 사례도 있었고...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어요.”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간호 학생들은 실습 시작 전에 나이팅게일 선서라는 것을 합니다. 나이팅게일 선서의 마지막 말을 동료 간호인들에게 해주고 싶네요. 자신이 선서식 때 이 말을 했던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고 간호받는 사람 중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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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인컴퍼니(Queer in Company, QiC) / 우리 회사에 성소수자가 다닌다
직장인 성소수자 드러내기 프로젝트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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