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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Mar 17. 2017

속기사 중에도 성소수자가 있다고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가퀴어, 자막방송 만드는 속기사 퐁당의 이야기

[인터뷰] n년차 속기사 팬섹슈얼 퐁당

저는 연애할 때 부모님께 다 얘기했어요. 걔가 저랑 사귀는 사이라는 것만 빼고요. 요즘 친한 친구가 있는데 나한테 뭘 해줬고, 같이 어디에 놀러 갔다고. 헤어지면 엄마가 먼저 ‘걔는 어찌 지내니?’하고 안부를 물어봐요. 그럼 저는 ‘걔 너무 이기적이라서 이제 안 놀아, 절교했어’이래요.(웃음)


인터뷰 중간중간 잔잔한 웃음보따리를 터뜨려준 두 번째 ‘퀴어인컴퍼니(QiC, Queer in Company)’ 인터뷰이는 5년 차 속기사인 퐁당. 퐁당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묻는 말에 “이성애자인 줄 알고 살다가 20대 중반 첫 동성 연인을 만나며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했다”“또 최근엔 팬섹슈얼(범성애자, 어떤 성별정체성이든 상관없이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로 재정체화했다”고 답했다.


소꿉놀이에서 아빠 역할만 맡았지만 그때는 내가 퀴어인줄 몰랐네


“우리 어릴 땐 종이인형 옷 입히기가 유행이었는데 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요. 남동생이랑 같이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레고 조립하고 변신로봇 가지고 놀고 그랬죠. 영화 <캐롤>의 장난감 기차를 보면서도 ‘어쩜…. 나도 어렸을 때 저런 기차 갖고 싶었는데’했다니까요.”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두 여성이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담은 여성-퀴어 멜로 영화 <캐롤>. 사진 하단에 퐁당이 말한 기차 세트가 보인다. ©캐롤 스틸컷

소꿉놀이에선 어째선지 아빠 역할만 맡았던 퐁당 어린이는 옷도 꼭 보이쉬한 청 재킷만 입으려고 했다. 어머니께서 친척 결혼식 날 치마정장이라도 입히려 치면 왜 굳이 불편하게 치마를 입어야 하냐며 투덜댔다고. 


“그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 되짚어보면 이런 취향이나 독립적인 성향, 내가 무시해왔던 것들이 퀴어라는 정체성과 무관하진 않은 것 같아요.”


ⓒ위키백과

직업도 어쩐지 독립적인 자막방송 속기사


개인적으로 속기사 하면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국회방송에서 필리버스터를 속기하던 국회 속기사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퐁당에 따르면 실제 속기사들이 가장 많이 일하는 곳은 자막방송 회사라고.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 공중파뿐 아니라 웬만한 케이블 방송사도 자막방송을 의무 시행하고 있다. 퐁당도 처음엔 국회 속기사를 목표로 속기사 자격증을 땄지만 막상 자막방송 회사에서 일해보니 자유로운 복장, 회식 일절 없음, 권위주의 없음, 상명하복 없음, 개인주의적인 사내 분위기가 월급 백만 원 이상의 가치를 한다고 자랑했다.


“속기사라는 직업 특성상 나이 제한이 없어요. 경험이 많을수록 전문용어도 더 잘 알아듣고 속기를 잘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법원이나 검찰 속기사는 어린 여자를 선호하죠. 왜냐하면 부려먹기 좋으니까. 그런데 저희 회사는 과장급 이상이 다 여자 선배들이에요. 그래서 남자 사원들이 욱해서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여자 상사들이 자기한테 뭐라고 하니까. 못하면 혼나는 게 당연한데 그걸 못 견뎌서. (웃음) 그래선지 모르겠지만 속기사 중에 여자들이 많아요.”


퐁당의 말을 듣고 갑자기 자막방송 속기사 꿈나무가 된 나는 어떻게 하면 속기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퐁당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그냥 타자만 좀 빨리 치면 속기사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인식이 있지만, 일단 속기사용 키보드는 일반 키보드와 다르게 생겼다. 속기용 약어 단축키 수천~수만 개를 외워 자격증을 따는 데만도 2~3년은 걸리고 설사 자격증을 딴다 해도 해도 체력적으로 힘들다.


“자막방송 속기사는 교대근무라 출퇴근 시간이 들쭉날쭉 이에요. 방송사마다 자막방송을 24시간 풀타임으로 하기도 하고 열 몇 시간을 하기도 하는데 자기 담당 방송사가 바뀔 때마다 출퇴근 시간도 바뀌는 거죠. 예를 들어 새벽 첫 방송이 4시라고 하면 출근을 새벽 3시 30분까지 해야 해요. 2교대 근무니까 퇴근은 자정을 넘는 경우도 많고요. 24시간 풀타임 자막방송팀으로 가면 2교대로 한 사람당 12시간씩 일해야 해요.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죠. 보통 일이 아니에요.”



퐁당,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다


20대 중반 첫 동성애인을 만나며 ‘내가 바이섹슈얼인가보다’했다는 퐁당. 왜 정체성 자각이 늦었는지 물어보니 십 대 때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퐁당은 여중, 여고를 졸업했는데 여학교다 보니 머리가 짧고 잘생쁜 ‘이반’ 친구들이 인기가 많았다. 퐁당은 그 당시 자신을 이반으로 정체화하진 않았지만, 학교에 퐁당을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퐁당과 놀던 친구들은 ‘너랑 어울리면 우리도 걔처럼 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너랑 못 놀겠다’라는 이유로 퐁당을 왕따시켰다.


“24살 때 원래 알고 지내던 레즈비언 친구한테 고백을 받았어요. 처음엔 싫다고 했었어요. 왠지 동성애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았고, 또 계속 이성애자로 지내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왜왜 우리 좋은 친구잖아’이러면서 그 친구를 설득했죠. 그런데 그 친구가 되게 적극적이었고, 저도 생각을 고쳐먹고 ‘그래 일단 저 친구가 좋으니까 한번 만나보자’하고 사귀게 됐죠.”


용기내 시작한 첫 동성연애를 8년이란 긴 세월 이어갔지만 퐁당은 퀴어로서의 정체성 고민은 크게 하지 않고 애인과의 관계에만 집중했다.


“제가 좀 수동적이었어요. 퀴어 커뮤니티에 나가서 친구들을 만들지도 않았고요. 연애가 끝나고 엄청 공허했죠. 이후에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번개도 해봤고 애인도 만나봤지만 연인 사이는 헤어지면 끝이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고민은 연인보다 퀴어친구들을 만드는 거예요.


인터뷰 내용과는 상관없지만 퐁당을 보면 왠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속 배두나가 생각난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컷


퀴어 사회화를 시작하며 바이에서 팬섹슈얼로


“제가 실제 나이는 30대라도 퀴어 나이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에요. 아가퀴어랍니다.”


퐁당은 최근 성소수자 관련 인권수업을 들으며 아장아장 퀴어 사회화의 첫발을 뗐다. 퀴어 친구들을 만나며 팬섹슈얼이라는 용어를 처음 듣고 자신을 팬섹슈얼로 재정체화했다고 한다.


“얼마 전 성소수자 인권포럼도 보러 갔었는데요, 거기서 활동가들도 봤지만 저처럼 그냥 참가한 사람들도 정말 많더라고요. 그제야 나는 그동안 그냥 만나는 사람이 여자니까 나도 성소수자야 이런 수동적인 생각에 머물렀다는 걸 깨달았어요. 최대한 퀴어인권, 페미니즘 관련 활동에 연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뜻깊은 뭔가가 있다면 참여하고 싶어졌어요. 지금 이 퀴어인컴퍼니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활동인 셈이죠.


전이었다면 이렇게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 거라는 퐁당. 그는 스스로 용기를 더 가지고 행동을 시작한 요즘이 좋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인권운동을 하기보단 우선 주변의 가까운 친구들,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것 봐, 나도 성소수자인데 아무렇지 않잖아’하고 보여주며 일상에서의 인권운동을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퐁당의 퀴어로서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다.


앞으로의 연재 계획
제 주변 성소수자들 중 퀴어인컴퍼니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지인들을 한 분 한 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모은 인터뷰이들은 5명입니다. 앞으로 연재될 인터뷰들을 읽어주시고, 인터뷰이로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싶으신 퀴어 독자가 계신다면 이메일(queerincompany@gmail.com)이나 QiC 트위터 공식계정(@queerincompany)으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퀴어인컴퍼니(Queer in Company, QiC) / 우리 회사에 성소수자가 다닌다

직장인 성소수자 드러내기 프로젝트 매거진입니다.

queerincompan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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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iC 매거진 https://brunch.co.kr/magazine/queerincompany

유동이 브런치 https://brunch.co.kr/@seedin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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