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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스 Sep 30. 2024

대하소설 최명희 <혼불> 10권 미완결 이후  뒷이야기

2020년 12월 13일 작성 ( ※긴글 주의)

 <혼불> (출판사 : 매안)은 1981년~1996년 17년 동안 연재되어 10권까지 출간되었던 故최명희 작가님의 미완결 소설입니다. <혼불>을 벗님들과 함께 10권까지 읽고 뒷이야기를 상상해서 블로그에 썼었던 것을 담아봅니다. 작가의 꿈을 간직하며 써본 글이라 뜻깊었습니다.


혼불: 오유끼의 한

얼굴을 치는 바람과 함께 안채에서 들어온 사람은 장옥란이었다.

얼굴이 가지색이 되었다가 이내 하얗게 질려버린 오유끼였다. 오유끼가 고개를 홱 돌려 쳐다보는 모습을 유심히 보는 김 씨의 아낙이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부지요? "

"오유끼, 모찌즈끼 오유끼 맞지?"

"저.. 그게.. 아니.."

"어머니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했잖아.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야?.."

열네 살 때였던가.. 장맛비가 지나가고 김제(金堤) 쇠여울(金灘)의 개울가에서 어머니를  따라 채반을 받치고 사금을 모아본 오유끼.  반지 하나 정도 만들 수 있는 모래 속의 금을 모아 고이고이 가지고 있었건만 일본순사들이 들이닥쳐 마을을 에워싸고 금이 나올만한 곳부터 막아서서 못 살게 괴롭혔다.

 아버지 친가 대대로 물려받아 농사를 지어오던 논을 보고 금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순사는 문서가 없다 하여 결국 쇠여울네의 논이 나락이 열리기 시작할 때쯤 통째로 빼앗아 버려 눈물을 머금고 중송아지와 함께 쫓겨나게 되었다. 쇠여울네는 오유끼와 동생들을 데리고 고리배미로 정착을 했지만 먹지 못한 탓인지 가운데 동생들을 차례로 보내고 7살짜리 막냇동생마저 힘없이 부황이 뜬 채로 미음만을 바라고 있을 이듬해 봄에 설상가상으로 땅속에 묻어둔 제기나 부엌의 솥, 먹던 숟가락마저 공출해 간 일본 순사들이 소가 되기에 아직 이른 송아지마저 공출해 가버리고 쇠여울네는 덜 녹은 임자 없는지 몇 해 되어 보이는 언덕을 찾아 그 자신의 목에 쟁기를 걸고 눈물로 땅을 일구어 냈다.

그래도 추수하기 전까지는 반년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기약 없는 남동생의 목숨 때문에 모를 꽂은 채로 원뜸의 이기채에게 논을 판 것이다.

그런데 기채 아니 기표가 차일피일 대금 지급을 미루어 칡뿌리를 캐 먹고 살 던 날..

"어머니.. 동생을 살려 주세요.. 제가 팔려 갈게요.."

했던 것이다.  

차마 딸을 팔아 아들을 살리는 짓은 못하겠다 하며 말리고 말렸지만 딱히 딸을 먹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끝내 야마시따라고 하는 일본인이 오는 날 통곡을 하며 보리쌀 서말을 받아 온 것이다.

(구차한 목숨 내가 죽어야 하지만 저 어린것은 누가 돌보누... 딸년 팔아서 입에 풀칠하는 어미를 용서해 다오.. 부디 너만은.. 그래 끼니라도 거르지 말길 바란다.......)

그날부터 오유끼는 모찌즈끼의 여급이 되고 못 볼 꼴 많이 보고 , 몸도 더럽혀지고 영혼까지 팔아 손님들을 상대해 왔던 것이다.

그 무렵 김제 옥선장에서도 순사들이 들이닥쳐 다 빼앗기고 장옥선은 독립자금을 융통한 것을 죄목으로 처형되었으며 장옥란도 모찌즈끼로 왔던 것이다.

한날은 얼큰하게 취한 야마시따가 오유끼를 앉혀놓고 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봐 ,, 너는 운이 좋은 거야.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니 말이야. 아무리 날 더러  세상에서는 욕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계산은 정확하다구. 적어도 조선의 양반이라는 족속들 보단 깨끗해. 니 동생은 죽고 니 모친은 살던 곳을 종적도 없이 떠났다고 하는구먼. 원뜸에 그 알부자집에서 말이야. 논을 판 돈 대신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는구먼. 아무렴 내가 백번 천 번 양반이지 안 그래? "

복수할 방법도, 어머니의 생사도 알 수 없던 어느 날 모찌즈끼에 온 손님으로 뜻밖에 강모를 만난 것이다. 원수의 아들을 사랑하게 된  오유끼는 갈등 속에 만주로 떠나는 강모의 행적을 좇아 필사적으로 열차에 탑승한 것이다.

"둘이 역시.. 안면이 있는 사이.. 그렇구먼.. 새각시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

김 씨의 부인은 모찌즈끼라는 단어만 듣고도 여급 출신인 오유끼와 강모의 속사정을 꿰뚫고는 그간의 의문이 해결된 듯 만족스럽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모래 속에서 걸러낸 금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어머니와 살 수 있었을까?  논에 금이 도무지 날수 가 없는 곳에서 살았다면.. 우리 가족은 같이 살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난 금반지는 어울리지 않는 인생이었나 봐.. 바보 같은 모래반지.. 모래로 만든 반지나 있다면 그 끼는 게 좋을.. 하찮은 인생인가 봐.)

오유끼는 예리한 칼날로 가슴을 베이는 것 같은 시린 통증에 눈물을 삼킨다.

혼불: 광견병

 일찍이 개명하여 단발에 구두를 신고 만주로 가는 열차를 탑승한 이기표의 좌석은 이등칸이었다.

아무렴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징병으로 끌려가서 총알받이가 되는 것보다야, 조모상도 지키지 못하고 만주로 간 조카와 특히나 아들 강태의  처지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옳은 선택이었다.

이기채에게 땅을 사고파는 일이며 살림의 실질적인 행정을 보아 적잖이 남겨먹은 돈이 아무리 일본순사들, 면서장 주머니로 들어가는 친일을 하는 기표라 할지라도 남 다 가는 강제징용에 딱 그들 아들들만 빼고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는 처지 중에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다.

강호에게 들었던 이들의 소식을 더듬어 서탑거리에 내려 작은 조선 같은 그 거리에서 국숫집을 찾아 거처에 도착을 한 기표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인 강태의 소식을 듣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숙부님.. 강태 형님은.. 남만주 의과대학에 입원 중입니다..."

"뭣이라구? 그놈이 왜? 고뿔에라도 걸린 것이냐?"

"개에 물려서 그만..... 광견병에 걸렸습니다... "

"광견병이라니.. 광견병이라니! 강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이냐?! 어서 말을 해 보아!!"

복사꽃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던 남만주 의과 대학 정원을 입원실에서 바라보는 강태는 아버지 기표를 보는 순간 구개를 푹 수그리고 굵은 눈물을 툭 떨어뜨린다.

기표의 시선은 강태의 붕대 감은 팔뚝에 고정된다.

"아, 아버지..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이게...!"

그 순간 옆에 누워 있던 심진학 선생은 충혈되어 불타는 듯한 눈이 증오심에 북받쳐 노려 보았다.  허벅다리는 붕대 사이로 진물 이 배어 있었고 사지는 빳빳한 광목에 묶여 있었다.. 누운 한쪽 입가로 진득한 침이 계속 계속 흐르고 있었다.

"으흐흣...! 나는 개에 물렸다... 더러운 미친개.. 일본에 물렸지만!... 우리는.. 조선은 죽지 않는다..  조선의 역사는 살아남아서..!" 하다가 가래가 끓는 기침을 토해낸다..

옆에 먼저 온 박해규의 미간이 좁혀지며 눈을 감아 버린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이런 봉변을 당하신 것을 보면 신이 도시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 드리려고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모야.. 강태 이놈이... 어떻게 된 것이야?... 살 수 있는 거냐?...."

심진학 선생과 이강태는 한 달 만에 병원에 찾아왔을 때는 별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았으나 다녀 간지 3일쯤 후부터 상처부위가 저리고 쓰라림이 심해졌다.. 의사는 진통제를 놔주고 공수병에 걸려 물을 먹을 수도 , 물소리를 듣기만 해도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에 수분을 주사로 공급해 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으며 길어도 열흘에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고 했다.

건강하지 못했던 선생님이 먼저 증세가 심각 해졌지만 강태도 감정기복이 심해 언뜻 보기에도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부모로 태어나서 가장 끔찍한 것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이다. 어째서 그 총명하고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던 강인한 아들이 이지경이 되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 기표는 이 사실을 매안에 알릴 시간적 여유도 없을뿐더러 방금 본 끔찍한 행동을 강태도 곧 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강모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또 물었으나 왜 강모는 멀쩡하고 자신의 아들만 이런 지경에 놓였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틀에서 열흘사이 호흡근이 마비되어 숨통이 끊어진다는 이 광견병.. 차마 손쓸 방법도 없으며 ,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히고, 내 새끼.. 이게.. 이게 무슨 일이여...!

"꽃니, 아니 봉출이 어매, 베갯잇 속에 잘 넣었는가 아? 어서 수천댁나으리 오시기 전에 기회는 딱 지금 뿐잉게. 기차 떠나고 손 흔들어 바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 명심혀. 잉?'

뱀처럼 간사해 보이는 옹구네가 눈을 찡긋 한다.

베갯잇을 따고 솜을 틀어 넣는다면서 솜 한중간에 부적을 넣고 티 안 나게 꿰맨 우례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아침부터 찾아온 옹구네에게 얘기를 들으면서 또 한 번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그런디 말여.. 옹구네는 왜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것이여.. 그것을 암먼 생각해 바두 영 모르겠구먼.."

"내가 전에 얘기했잔혀. 설운 과부 평생 세상 고르잖는거 죽기 전에 꼭 한번 천지개벽되는 거 봐야것다고.. 왜 같은 사람씨가 지름 좔좔 흐르는 밭에 떨어지는 거 하고 시방 돌밭에 떨어지는 거 따라서 취급이 달른 꼴이 싫다 이 말이여. 옹구야 죽은 지아배를 아배라 부르기라도 해 봤지마는 봉출이 지도 눈이 있으면 지아배가 누군지 다 아는 거인디 홍길동처럼 이배를 아배가 못 부르고 성을 성이라 못 부르고 있는 꼴이 하 가엾어서 그리여. 양반님들도 상것 종것 싸악 섞여가지고 우리도 사람대접 좀 받아 보자 이것이여. 증가.  어차피 청암마님도 남우 살림 기냥 씨가 빠지도록 일으켜 놓고 돌아가셨지만 아무 소용없는 거이제? 피 한 방울 안 섞인 집안 살려 놓고 갔다만 조짐이 안좋응게 청호저수지에 조갯바우부터 빠짝 마르더니 나라가 이 꼴나고  씨종자 들도 어째 그리 따악 누가 시킨 것 맹이로 손잡고 야반도주하더니만 돌아가 부리셨잖여?  이게 다아 징조였지 맹. 본 것 아니지만 뻔하지 뭐 , 그 많은 가산이 할 짓만 해갖고 그리 살림이 일었이까? 생전 젊은 날에 못할 짓도 했다등만, 숭년에 장리 빚이란 거이 한번 지기 시작하면 목숨으로 밖에 못 갚는 거 아니것어? 넘한테 못할 짓 하고 원한을 사면은 당대 아니면 후손들한테라도 갚아지는 거이다. 내 말이 아니고 봉출이 어매도 들어서 알 거야. 논밭 다아 빼앗기고 이 집 와서 죽었다 등가, 비렁뱅이가 되얌서 쬣겨나면서 느그집 곡간에 쌀이 썩어나도 먹을 사램이 없어서 못 먹는 날이 올거이다. 내 생전에 그 꼴을 못 보면 죽어서 혼백이라도 남어갖꼬 느그집 씨구녕을 막어부릴거이다 했다잖여,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묏구덕도 때마침 파이고 정신없을 때 딱 지금이여. 이젠 우리가 일어날 때이여. 여튼 새터서방님 못 오면 누가 대를 잇겄어? 어린 내터서방 희재도령 영재도령 있지마는  다 자랄 때까지 가산은 누가 돌보건대, 자연 핏줄이 또 땡기는 법이라..  우리도 사람대접받아보자.. 우리 우례. 우리 봉출이 아부지 찾아 주잔 말이여."

혼불: 부서방의 능력

"이 한 몸 한 끼니 이상 굶어보지 않고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굶는 사람이, 억울하게도 힘써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평등한 세상을 꿈꿨는데.. 지도자의 소양을 기르기 위해 만주로 왔는데... 면목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매안만이라도.. 작은 마을이라도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들어 주십시오.. 가진 자의 특권이 없는 고른 세상..."

"아비 앞에서 할 말이 그런 것 밖에 없느냐!.. 지금 니가 죽어가는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냐... 흐헉..흣!.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렇게 횡액으로 보내고 내 어찌 더 살 수가 있겠느냐! 이놈아..!!! 응? "

"아버지.. 제 동생 봉출이를 거두어 주십시오.. 한 번도 말 걸어보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아들 아닙니까.. 한 가정도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개혁을 해보겠다고... 흐흣흐., 어머니,. 그리고 희재, 영재.. 새터에서 시집와서 이날 이 대도록 섬겨준 처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용서하시오..."

보는 사람도 괴롭고 처참한 광견병으로 심진학 선생이 발병 나흘 만에 죽고 이강태가 남만주의과대학에서 입원 여드레만에 죽기 전 아버지 이기표 앞에서 강태가 맨 정신으로 한 마지막 말이었다.

하루하루가 긴박하고 물소리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키는 강태를 두고 부모 된 마음에서 끼니가 제때 들어가질 리 없었다.

(내가... 이 몰골을 보려고... 이렇게 머나먼 땅까지 왔더란 말이냐! 차라리 안 왔다면..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면 이 대도록 마음이 심란하지 않았을 것을...!) 품 안의 자식이라면 모를까 혼자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며느리와 손주들이 상을 치러야 했기에 의과대학에 시신을 안치 한채 식솔들을 데리고 와야만 했다.

아들의 마지막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온 이름 봉출. 기표는 마음이 복잡했다. 모른 척하고 묻어버린 이복아들. 추봉출.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눈감아준 이름, 커나가는 모습에서 더욱 확고하게 부정한 아들의 이름을 들은 것이다.

강태의 하숙집에 기표가 가 있는 동안 부서방이 제일 면점 김 씨에게 손을 모으고 이야기했다.

"저어그.. 그게.. 제가 온 지 몇 날 안 돼야 갖고.. 자식새끼들 둘이나 떠내려 보냄서도 기구하게 여읜 새터 서방님 초상꺼지 나 불었다만 지가 내려가갖고 소식을 알리긴 알려야것어라우.. 그게 돌아가신 청암 마님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길잉거 겉으니께.. 심란하시겠지마는 처자식 몇 날만 죽지만 않게끔 부탁 드리입시다 요... "

"맨발로 언 땅 밟고 온 사램이 또다시 어느 세월에 가서 소식 전하겠소.. 서방님한테 말씀이나 드려 보시오."

" 지가 부끄럽지만서두 글자를 쪼메 아는디요.. 주소 내용 적어갖고 돌아가신 마님이 주신 쌀 바까서 만든 돈으로 기차 타고 한번 다녀 올터이니.."

"글자를... 아신다구?"

"예에.. 매안서원에 돌아가신 아부지가 서원에서 노비로 있음서 마당 쓸고 계실 적에 유생분 중에 한 되련님이 알랴 주셨다고요오.. 너도 나중에 쓸 일이 있을랑가 하시믄서 생전에 가르쳐 주셨지라우.. 헌 게 한자는 쪼금 알지라우.. 안 쓴 지 오래됭게 잘 써질 랑가 모르겄구먼이라우. 어려운 전갈이라 직접 쓰시는 마음 어려불 터이니.."

"허참..! 돈이 있으면서 애 귀때기는 왜 떨어지게 하고 볼은 왜 잘러서 둘이나.. 허참... 이런 일이 있나.."

목 울대가 흔들리며 눈물을 삼키는 부서방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자식을 둘이나 잃고 식구의 배를 곯리면서까지 아껴온 돈을 , 강태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그 목숨같이 아끼는 돈을 기차표값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다.

"이 돈이 기냥 돈이 아니지라우... 목숨이지라우. 만주 가서 한번 자리 잡을라고 애끼고 애끼고 ... 허헛..."

애써 웃는다.

새터댁과 강태의 두 형제를 위해 쓰는 편지의 필적은 놀랍도록 반듯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는 하지만 서원에서 겨우 면천이 되어 상민이 되어도 일손이 느리고 손재주가 없어서 남들 다 바쁜 농번기, 추수 때도 쉽사리 일감이 들어오지 않아 흥부같이 주렁주렁 낳은 자식들과 처를 굶겨 죽이기 직전 청암부인의 곳간을 털러 갔다가 하사 받은 눈부시게 흰 쌀 한 가마니.

제 아무리 아랫몰에 살던 부서방이 문자를 알고 쓸 수 있었던 들 양반이 아닌 처지라 쓸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십여 년 만에 쓰는 글씨체는 매일 연습을 한 듯 판에 찍힌 듯했다.

훗날, 제일면점 국숫집 평안도 출신의 김성직이 확장하려는 사업, 맞은편에 조선 이민들을 위한 생필품이며, 김치, 그릇, 의복판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선 사람을 위한 서신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조선사람. 그 일에 뜻밖에 부서방과 그의 가족의 일손이 긴요하게 쓰여졌다.

서찰을 들고 가슴에 죽은 아이들을 묻고 가족들을 맡겨둔 채 그 목숨 같은 돈으로 조선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혼불: 강실이의 눈물

회복은 더디었지만 옹구네의 지극 정성으로 춘복이는 차차 걸을 수 있게 되자 강실이를 어서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몸이 성치 못할 적에 부축을 하던 옹구네가 화가 나서 논두렁으로 밀쳐 버려 나뒹굴어지고 나서도 춘복은 강실 아씨가 이 마을을 빠져나가선 절대 안 된다는 일념하에 기적을 일으키듯 정신을 모으고 회복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 갈 거요. 일단 이 두 눈으로 아씨를 봐야겠으니까 무튼 참견 마쇼. 작은아씨 가면 안돼요.. 조옴!"

" 허매.. 열부 났구먼, 열부 났어어? 아조 혼자 보기 아까워 죽겄네 기양. 양반님네 규수로 태어났었드라믄 열녀문이라도 대문짝만허게 세워줬겄다만 상것으로 태어나가지고 양반처자 도독질 하는 처지, 어쩌끄나? 그래도 이만치라도 살아나게 해 준 공은 잊지를 말어 부리야지, 어차피 일어날 힘도 벨라 없는데 가긴 어딜 도망간단 말이랑 가아. 우선 서열부터 확실히 정해놓고 가도 가잔 말이여어. "

"서열은 무슨 서열이요?"

"서열은 무슨 서열이요오? 좀 그 요짜 좀 빼면 안 되나? 깨구락지도 뽀오얀히 삶아 멕여놨더니 한 해 두 해 보는 것도 아니것고 , 내가 큰마느래. 강실이는 작은마느래지 뭐겠어. "

하고 대낮부터 감겨든다.

"마느래가 무슨 소리요. 옹구네가 간병해준 것은 내 은공 잊지 않겠소만 마누라라고 생각해 본 적 없소."

"허구야아... 시상에.. 옛말 그른 것 하낫도 없네잉? 머리 검은 짐승일랑 거두질 말으라 하더니만 뭐어? 은공을 잊지 않것다고? 매급시 은혜를 잊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믄 어떻게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여? 내가 다 누굴 위해서 꿩 잡아 바쳤드니만.. 까딱 잘못했다간 나도 이판사판, 바로 원뜸에 알리고 다리몽둥이 뿌러지고 피 튀겨 감서 콱 죽어 불랑게. 내가 죽을 때 혼자 죽는 줄 아나? 애기씨 태중에 애기는 내 말 한마디에 달려 있는 것 명심 혀어. 여자가 한분 한을 품으먼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헛거이 아니랑게. 으응? 명심혀."

춘복은 도대체 저 미운 여편네의 신묘한 말재간은 어디에서 배워 왔는가 기가 차서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하고 허공을 보며 오른 팔로 옹구네의 왼쪽어깨를 지긋이 당긴다.

"큰마느래 하기요. 강실 아씨만 무사하다면 내 소원이 없겠소."

(작은아씨... 제발 춘복이의 아들 하나만 낳아 주시오. 이 상놈의 한 좀 풀어주시오. 살려 주시오...... )

강호가 사천왕에 대해 도환스님과 며칠간 교류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공배네를 또다시 마주쳤다.

우연인 것 같지는 않고 마치 강호를 기다렸다는 듯 다급해 보여서 그네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이라도 난 것입니까..."

"저.. 서방님 이것을 어뜨케 설명을 해야 할지.. 말씀 디리믄 상것 목숨 여럿 날아갈 일인디요.. 방도가 없어도.. 그래도 말씀 디리는것이 맞는 것 같은디 원뜸에 찾아가서 말씀드리기도 그렇고.. 이 일이 알려져서도 안될 것 같고 이를 어찌하면 조으까요, 사리반 서방님은 그래도 양반님은 다르시니께.. 궁리가 나올지도 모른 생각이 펀뜻 들어서요....."

(아이그.. 그 여펜네 올 때가 다 되얏는디.. 아이고 춘복아..)

"혹... 죽었습니까?..."

"죽기야 닷새에 만동이는 죽어부렀고.. 그보다.. 옹구네 집에.. 작은아씨가 계시는디요... 아이그.."

"무신 말씀이오? 강실이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몸이 좋지 않아 정양을 간다고 전해 들은 강실이가 왜 거멍굴에 , 그것도 옹구네 집에 있는 것인지 납득도 유추도 할 수 없어 강호는 당황한다.

"지금 차근차근 설명 디릴 수가 없는디 제발 살려 주십시오.. 옹구네가 돌아오기 전에 천행으로 사리반 서방님을 만났네요..."

서둘러 방문을 연 강호에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강실이의 둥글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배였다. 그다음으로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체구와 괴롭게 눈을 감은 반쪽짜리 얼굴, 붉은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마른 입술이었다. 그 옆에 은장도가 있었다. 아마 자결하려고 했지만 기력이 없어서 오른쪽 목에 약간의 상흔이 있을 뿐이었다.

걸을 힘도 없는 강실이가 마음먹은 대로 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원을 부르러 공배를 보내고 공배네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려 했을 때 싸리 울타리 앞에 정지상태의 옹구네와 춘복이가 서 있었다.

"아이구우, 사리반 서방님 또 뵙네요잉?"

당황함을 이내 감추고 옹구네가 춘복이와 함께 마당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언제 드려도 디릴 말씀인데요오, 강실 아씨가 길잩에 쓰러져서 제가 이 등에 업고 왔지요, 원뜸에 알려야 하는디 암먼 봐도 이 몸으로 마실 나가시는 것 겉지는 않고 보따리 바리바리 싸갖꼬

비접가시는 길인 모양인디 알리면 더 큰일 될 거이 뻔해가지고 제가 며칠 모셨지요 잉."

춘복이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문간에 섰을 때,

"작은 아씨이!!!!"

소리치며 들어간다. 옆에 양반 강호가 있건 없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강실이의 생사 확인이 중요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 )

언뜻 보기만 하여도 정황이 예사롭지 않아 피바람을 예측한 강호의 눈빛이 흔들리는 중에 옹구네는 태연스럽게 강실이를 곁눈질로 살피려다 옆에 덩그러니 놓인 은장도를 보고 당황한다.

"지금 애기씨 태중에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가지고 지금 무슨 짓을 할라 치는 것은 아니것지멩? "

하고 공배네를 오히려 노려 본다.

공배네는 또다시 기가 차서 대꾸도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쉰다.

(저년은 사램도 아니다.)

"사리반 서방님 오셨잉게 제가 몇 번이라도 자초지종 조곤조곤허게 말씸 다릴 수 있는데요, 그라먼 우리 상것들은 어차피 맞아 죽것지만 저그 계신 아씨나 원뜸에도 줄초상이지요.. 어뜬게 다 같이 사는 길인가아 시방 그 생각 중인 게요."

목숨 걸고 본인이 직접 보았노라 말하는 옹구네의 점 박힌 입술이 번들거린다.

강모와 강실이 간에 그런 불미스러운 소문이 저네들끼리 한바탕 도는 동안 문제의 핵심에 있던 종가는 왜 몰랐으며 당사자 강모는 지금 왜 계집과 만주에 있는가 너무나 문중이 부끄러운 강호였다. 게다가 강실이의 태중의 아이는 내가 인력거며 고물을 팔아 번 깨끗한 돈이라며 쥐어 준 농막의 춘복이, 그의 씨라니!

만주에 들렀을 때 강모옆에 있던 오유끼, 소식을 들은 효원이 다리에 맥이 풀려 잡혔던 엉겁결에 잡은 차가운 손목이 한 번에 가득 떠오른다.

그 무엇보다 며칠 전에 본 가릉빈가의 날개 곁, 다문천왕의 왼발을 잡고 있던 여인이 왜였는지, 강실이 같은 기분이 들어 계속 보게 되었던 그 아름다운 음녀를 보고 와서 뜻밖에 이런 정황에 처하니 매우 혼란스러웠다.

강실이의 감은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물이 고개 돌린 저쪽 귀로 흘러내리는데 이상한 것은 점점 몸이 따스해지는 것이었다. 그네도 모르게 아깐 도저히 은장도를 잡을 힘조차 간절했을 때완 달리 손발에 따스함이 돌고 이 치부를 들켜 살아난다 해도 목숨을 장담키 어려운 이 수모스러운 정황에서 힘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 손발을 주무르며 나를 불러주는 이가 꿈에 그리던 강모 오라버니가 아닌 걸 알겠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고 목이 메는 이 감정의 이름은 혹시 행복은 아닌지. 그럴 리 없는데.

자신을 이토록 간절하게 불러주는 이가 어머니도, 강모도 아닌 , 춘복이었다.

아이의 아비였다.


혼불: 환향(還鄕)

아름답고 따사로운 매안의 봄이었다.

"오라버니, 식사하셔요."

개울길 앞 편편하고 널찍한 돌을 밥상 삼아 사금파리에 살구꽃밥, 명아주 잎을 살짝 찧어서 만든 나물반찬, 물이 오른 버들강아지 여린 가지 두 개를 분질러서 가지런히 놓아 차려준 강실이와 함께하는 소꿉놀이였다.

"그래, 오늘은 반찬이 참 좋구나. 마침 시장하였는데 잘 되었다."

흐뭇하게 어른 흉내를 내며 막 젓가락을 들려 하는데 강실이 뒤에 보이는 풀숲에서 무언가 보시락 보시락 소리가 나서 보았더니 너무나 귀여운 청개구리 한 마리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강모를 갸우뚱 쳐다보았다. 애교스럽기까지 했다.

"배 고프냐?"

"응."

"밥 좀 줄까?"

"응."

"싱겁냐?"

"응."

"자, 반찬. 짜냐?"

달콤한 꿈이었는데 순간, 강실이는 없고 오싹해지면서 안서방이 학교 갈 때 안서방의 등에 업혀서 들었던 이야기로 진행이 되더니 갑자기 개구리가 펄쩍 달려들어 울부짖는다.

"한번 물어보고 말 것을 왜 물어봤어! 한번 주고 말 밥을 왜 떠 주었어? 한번 놀아주고 도망갈 걸 왜 동무해줬어?! 죽는 날까지 따라갈 거야! "

얼굴은 이미 개구리가 아니라 오유끼였다. 강모의 목을 피가 철철 솟구치도록 물어뜯는다.

"으.. 으윽.. 악!"

(정말 기분 나쁜 꿈이다.. )

등골에 식은땀이 한 줄, 타고 내린다.

끔찍한 고통 속에 심진학 선생님과 형 강태가 죽고 심약해져서 그렇겠거니. 하지만 오유끼의 모습이 너무나 섬뜩하게 남아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내 저것을 떼어놓고 싶다. 난 데리고 온 적 없다. 나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데 집안과 재물과 강실이, 처자식, 나 자신까지도 모두 버리고 왔는데 어째서 니깟것이 따라와서 나를 옥죄는 것이냐. 나는 할머니의 혼이 담긴 삼백 원으로 , 내 가장 귀중한 것으로 값을 치렀는데, 단지 묶여 있는 것이 불쌍해서, 내 모습 같아서 놓아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탈옥을 실패한 죄수처럼 분하고 허탈한 강모는 모로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오유끼가 역겨웠다.

"나, 왕관카회에 들어갈까. 거기서 살구."

왕관카회는 서탑거리 말미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장옥란이 여급으로 있는 신식 음식점 겸 서양술집이었다.

"... 안 잤어?"

"응. "

그 '응'에 개구리 악몽이 살아나면서 강모는 찝찝한 표정이 된다.

"나 같은 화냥년은 아무래도 그냥 창부가 어울리나 봐. 기생도 소실도 아니고. 국숫집 아주머니한테도 다 들켰어."

오유끼는 슬프게 픽 웃는다.

꿈은 반대인가. 스스로 떠나 주겠다니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잘되었는데 또 처음 모찌즈끼에서 만난 날처럼 사내가 앞섶에 손을 넣든 말든 상관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어차피 상관없잖아. 잘 된 거야.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이제 훨훨 날아갈 수 있겠군.)

"응. 그렇게 하던지. 그렇게 해."

"하아, 너무 하네. 말이라도 가짜라도 좋으니 가지 말라고 해봐."

나는 모른다.

모른 척하고 떠나 온 강실이의 생사가 궁금해진다.

강모 자신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지만 오자마자 아들을 잃으신 수천댁 숙부님에게 강실이에 대해 어찌 물어볼 수 있으리오. 그러나 기표는 강실이가 아파서 정양을 가려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을 때 강모의 남은 평정심마저 모두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강실아.. 연둣빛 둥글고 이쁜 사람아... 차라리 죽어라. 차라리 죽어서, 너도 죽고, 나도 죽어서... 다음 생애는 차라리.. 백정이나 무당 집안에 태어나서... 근친혼을 할 수밖에 없는 집안에 태어나서...)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천민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강모가 근친 혼을 위해 천민으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은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자신이 무참히 짓밟은 여인더러 죽으라니. 쳇바퀴 안에서 도망 다닐 궁리만 하는 강모 스스로가 한심스럽다. 자신을 마음껏 비웃으며 부서방이 집안에 부고를 알리고 사람들을 데려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떠나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한다.

효원의 중압감 있는 큰 키, 생각지도 못하게 생긴 아들 철재, 아버지의 놋 재떨이, 쇠 부딪는 소리.. 그물, 자신 혼자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다시 그곳을 가려한다. 사마귀를 본 여치가 두려움에 떨면서 사마귀를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가야겠기에 가려 한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떠나고 떠나서 다시 내가 있던 집이라니. 그래. 차라리 징병으로라도 가지 뭐. 나 혼자 죽지도 못하는 목숨, 병사가 되어 총알받이라도 된다면 , 그게 바로 벌 받는 것이리라.

오유끼가 왕관카회에 한번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섰을 때 숙부 기표에게 매안에 가겠노라 말씀드리고 낯선 땅에 어른을 혼자 두고 조선행 기차를 기다린다. 무의식적으로 오유끼가 따라오지는 않았는지 뒤, 옆, 인파 속을 두리번거리며 찻간에 올라탔다.

혼불: 춘복의 난


진의원을 모시러 간 공배는 진의원이 출타 중이라 하는 수 없이 돌아왔다.

강호는 자초지종을 듣고 강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한 끝에 문장 동계어른 이헌의, 이징의, 이기채가 있는 사랑으로 황급히 찾아간다.

"할아버님.. 어르신, 매안 향약을 폐지하여 주십시오. 사정이 급합니다."

"뜬금없이 그것이 무슨 버르장머리냐? 매안의 기틀이자 법인 향약을 폐지하자니. 모두 모이는 구월구일이 되려면 석 달도 넘게 남았다. 혼자서 결정할 일도 아니거니와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

"향약이란 이 지역 마을의 약속이 아닙니까. 헌데 제가 많은 사람이 알아보기 쉽게 한문을 한글로 풀어쓰고 나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양반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 , 혹은 양반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심판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

"동경 유학을 갔더니 왜놈들이 그리 가르치더냐? 잘못을 했으면 처벌하고 다스려야지 질서가 잡히느니라. 그냥 생겼다가 그냥 없어지는 것은 없어."

"하오나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양반이 그저 찍어 누른다고 그 아래 계층의 사람들이 말없이 참고 넘어가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종문서도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니 집에 노비들도 속량을 해 주셔야 합니다. 이제 그들도 권리를 찾아야 하고요.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신분이 낮다는 이유 만으로 빼앗기고 , 박대당하는 시절이 아닙니다. "

"한 가지 물어보자. 너는 양반이냐, 천민이냐."

"제가 그동안 얻은 혜택들 당연하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늘 그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실은... 강실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강실이를 찾았는가?"

옆에서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남평어른 칠순을 넘긴 이징의가 깜짝 놀라며 묻는다.

"강실이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

"왜 향약이 심약한 여인의 목숨이 달린 일이냐. 만약 잘못을 한다면 반상 관계없이 공정한 것이다. 한 명의 목숨이 마을전체의 균형과 질서보다 중하단 말이냐?"

그때 안서방이 급히 찾아온 부서방의 전갈을 전한다.

"뭣이라고? 강태가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

친형제 같이 지냈던 강태가 미친개에게 물려 죽다니 새터댁에게도 알리고 집안이 아수라장이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강호는 더 지체할 수 없이 이번엔 오류골댁으로 향한다.

멍하니 부은 눈으로 삽짝을 내다보고 있는 오류골댁은 뜻밖의 강호의 출현에 놀란다.

"숙모님, 강실이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

안채 기웅이 문을 화닥 열어젖히며 순간, 포효하듯 묻는다.

"무어라구? 무엇이라 했느냐, 강실이가 살아있단 말인가? 어디 있느냐!"

"아... 아니, 우리 강실이가.. 살아있다구? 어디에서..... 만나 보았단 말인가..."

오류골댁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변한다.

기응은 이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강실이가 덕석말이로 죽을 바에는 불을 질러서라도 먼저 세 가족이 다 함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 시각 춘복이는 강실이를 농막으로 옮기고 옹구네의 도움을 받아 거멍굴의 난을 준비한다.

"강실 아씨 태중에 내 씨가 있소. 상것들도 양반 규수와 혼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시다. 우리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줍시다!"

투장을 들켜 남편 막둥이가 덕석말이로 죽고, 당골 판을 잃어버려 동냥을 받을 수 없는 무녀 백단이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택주는 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 이 팔천(八賤)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백정이었다.

성냥간 공장의 벙어리 금생이도 함께 횃불을 들었다. 차별 없는 세상 천지개벽을 꿈꾸는 옹구네는 양반의 얼자로 단 한 번도 기표를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한 봉출이의 어미 우례를 앞장 세워 이기채 집안의 노비, 호제 중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았다.

뻣뻣한 눈썹 터럭 끝 달팽이처럼 도르르 말려있는 춘복이가 앞장서서 이기채의 마당에 들이닥쳤다.

"향약을 폐지하고 강실 아씨를 나 춘복이에게 출가시켜라! "

"와아아아-!"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일어난 혁명이었다. 춘복이의 꿈이었지만 그 설움의 세월 동안 모두의 한이자, 모두의 꿈이었다. 서러운 소원. 변동천하.

효원은 강실이가 살아있다는 소식만이 그저 감사하여 용서를 받은 것 같아 눈물이 흘렀다.

(그대.. 살아 있어 줘서 고맙소. 그저 고맙소.. 오류골 아씨는 그래도 사랑받았소. 부럽소...)

거멍굴과 노비들이 마당으로 들이닥칠 때 황급히 뛰어나온 안서방네가 마당을 보았다. 

언제 저리도 길게 자랐을까. 가칠한 엉겅퀴가 큰 키로 자라 있었다. 

마당 귀퉁이에 풀이, 나 있었다.



   - 최명희 <혼불> 뒷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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