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렇게 나쁘고 게으른 사람 아니에요?"

11일 차: 핑계

by 나예스

"시간이 없어."
어떤 일이 하기 싫을 때, 막연히 많은 시간이 들 것 같을 때, 해야 할 일에 별다른 매력을 못 느껴서 다른 일에 내 시간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돈이 없어."
돈을 써야 할 때 내가 생각하는 결제 대상의 효율이나 가치보다 예상되는 투입금액이 더 크다면 이렇게 말했다. 돈 빌려달라는 말을 거절할 때도 썼다.

"나 아파."
다른 것을 하느라 집안일을 못했을 때, 거실에 건조기에서 나온 지 오래된 빨래산을 만들고 당장 쓸 그릇과 수저를 설거지해야 할 때, 잠자리 동화를 30분 읽어주다 지쳤을 때 나는 가족에게 나 아픈 사람인 거 잊었냐고 말했다.

핑계가 좋았다.
나쁜 사람으로 평가되기 싫어서 나오는 변명과 자기 합리화. 내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을 때 나는 핑계를 댔다. 가장 많은 핑계는 단연 시간과 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상황을 회피하려는 핑계가, 죄다 행복과는 가장 먼 곳에 있다.


시간이 없어+돈이 없어+건강이 나빠
= 나 '불행한 사람'이라 광고하는 것


내가 줄곧 꿈꿔왔던 '경제적 자유'는 나의 계속적 건강을 전제로 한, 충분한 경제력과 자유시간을 의미했는데, 입으로는 몹쓸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바쁘다'는 말과 결을 같이 한다. 핑계와 미루기의 콜라보는 완벽한 눈속임이었다.

바빠서 + 언젠가 = 자기기만


" 그걸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지금은 다른 일로 바빠. 나중에 언젠가 기억이 나고 때마침 한가하면 할 의향은 있어." 정도로 풀어낼 수 있다.

짐작하겠지만, 역시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족 챙기고, 직장에 다니고, 각종 모임을 갖고, 투자하고, 독서하고, 좋은 습관을 만들고, 어항 열대어들을 돌보고, 일과를 기록하고, 글을 쓰다 보면 바쁘지 않은 날은 1년에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

작년 초에 약 7개월 동안 일을 쉬었었다. 퇴사 전에는 쉬기만 하면 그 방대한 시간에 책도 무지막지하게 많이 읽고 글도 많이 많이 써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퇴사 전 머릿속 상상으로는 이미 책 한 권도 나왔다. 욕심은 많았다. 다만 목표만 있고 실천 계획이 없으니 다른 갑작스러운 일과 숙제들로 시간이 채워졌다. 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밀어 넣지 않은 모든 일들은 후순위로 흐지부지 되어 불만이 커졌다. 오죽했으면 남편은 내가 직장에 다니지 않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좀 쉬겠다더니 왜 또 종일 바빴어? 일을 하나, 안 하나 똑같이 바쁠 것 같으면 차라리 돈 벌면서 바쁜 게 낫겠다."
그랬다. 남편은 '생산성이 있는 바쁨'을 채근했다. 출근하지 않을 때 나는 그림 그리기를 배우며 숙제하느라 많은 시간을 썼다. 반장으로서 챙기는 전시회 준비 손품팔이와 독서 모임원들과의 유대 관계, 독서의 진도 빼기, 화분 가꾸기에 진심이었다. 내 활동에서 경제적 생산성은 없었지만, 힐링과 성취감이 있는 일이었다. 실업급여를 받기도 했으니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찝찝한 마음 한 가지가 발목을 잡았다. 퇴사 전 내가 무엇을 원했더라. 아, 책 쓸 시간.
일만 쉬면 마음껏 글 쓸 텐데, 잘 쓸 마음의 준비만 6개월 했다.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가 나보고 글 안 썼다고 때리는 것도 아니고, 글 썼다고 상주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가족도 안 읽어주는 글이 그렇게 쓰고 싶었을까. 그리고 왜 그토록 못 썼을까.

결국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안 쓴다며 괴로워했던 글, 여기에 시간 배분을 해두지 않았다. 하루 끝에 뚱한 표정으로 독서대 앞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책은 재미있는데, 글 쓸 마음이 미뤄졌다. 컴퓨터 앞으로 가기가 싫었다. 확실히 나의 우선순위는 독서와, 독서모임이었다. 그러니 하루 힘을 다 쓴 심야에 무슨 글 쓸 힘이 있었을까. 자의로 시간 배분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글 쓸 환경'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인복이 터져버려서 두 가지 글을 같은 달에 완성했다. 욕심껏 제안을 받아서 실컷 쉬고 취직할 때쯤이었다. 교육청에서 진행했던 '학부모 에세이 쓰기' 프로그램 수업을 두 번 들은 뒤 출근하느라 수업을 듣지는 못했지만, 에세이 숙제는 이어졌다. 출근 첫 번째 달에 열 꼭지를 써서 책으로 만드는 일, 그것을 하면서 '7일 만에 전자책 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단시간 근로 경리 취업 노하우를 엮어 전자책으로 냈다. 그러고 보니 뜻 한건 아니었지만 독서모임원들과의 유대는 나에게 큰 생산성을 가져다주었다. 학부모 에세이 쓰기는 같이 참여해보자는 독서모임원 분의 권유였고, 전자책 쓰기는 또 다른 독서모임원 분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결국 작년의 내 글을 쓰고 완성하게 한 요소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점이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글 빨리 쓰라고 채근하는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가서 바쁘거나 말거나 숙제를 해냈다. 마감을 앞두고 단기적으로 잠도 부족하고 다른 많은 중요한 일들에 소홀해졌지만 드디어 나는 단전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지금도 매일 '영감어'를 전날 밤에 공지받는다. 오늘은 '핑계'다. 출근길에 폰으로 끄적이고, 일 하면서 영감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퇴근길에 쓴다. 오늘의 가장 우선순위다. 다만 독서량이 눈에 띄게 줄어 속상하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걸까. 매일 다른 주제로 끄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66일 글쓰기 미션 중 반타작만 해도 대 성공이라 여기며 시작했다. 매일 글 쓰는 걸 10일 이상 하다니 벌써 내가 대견스럽다. 작년 통틀어서 브런치에 쓴 글 횟수를 넘겼다.

지금 나는 어떤 핑계를 대고 있나. 운전 연수받을 시간에 대해 핑계 삼은 지 반년이 다 되었다. 운전하기 무서워서 차살 돈 핑계를 댔다. 남편이 아직 면허가 없는 건 내가 운전 못할 핑계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가 아니라 올해, 글쓰기 다음 순위로 운전을 꼭 해서 내 안의 큰 숙제를 완성해야지. 그때는 눈 질끈 감고 차를 마련하고 연수를 받아야지. 우선 지금은 얼마라도 더 브런치에 쓸 것이다. 두 마리 토끼 중에 좀 더 큰 토끼에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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