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권이 만들어낸 모계사회

13일 차: 외갓집

by 나예스

내가 체감하기로는 현대 사회는 완벽한 모계중심의 사회다. 30여 년 전의 사회 분위기와 확실히 다르다. 여성의 사회 진출로 수치화 된 '가계 기여'가 있었다. IMF사태로 돈을 더 이상 못 벌어오는 가장이 늘고, 그 틈을 메우는 여성이 생겨났다. 돈이 권력이었다.

생활고에서 적극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여성들은 일거리를 찾았고, 맡벌이를 하면서도 가정에서의 전통으로 이어오던 역할을 모두 해야 했기에, 여성의 인권은 더 빠르게 조명되었다. 집 바깥에 있는 여성은 집 안의 어른의 식사와 일거수일투족을 챙기기 어렵다.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부담은 현실적으로 여건이 안 되었고, 일이 핑계도 되어 주었다. 확실히 엄마는 식당일을 나가면서부터 명절에 출근하느라 비록 몸은 고단했을 지 몰라도 시댁에 밤 늦게 도착하는 마음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20대에 일했던 고객센터의 상담원분들 중에서도 '미리부터 시댁 가기 싫다'는 이유로 자원해서 명절 연휴에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위한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일하는 여성과 집안에서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는 여성도 평등했다. 육아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에너지와 헌신이 필요하다. 나 자신의 삶이나 커리어보다 우선해야 할 시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출생이 귀해지는, 출생 자체만으로 많은 권리가 생기는 시대가 되었다.


6~7명 남매인 나의 부모들과 달리 나는 아이 1명이다. 사실 더 나을 엄두가 안 났다. 나 대신 육아를 맡아 줄, '비빌 언덕'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채로 여럿을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러려면 내가 사회 진출을 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 보면 맡벌이를 하는 여성은 대체로 '친정 엄마'가 집에 자주 왕래 해서 육아의 구멍을 메워 주었다. 내가 신혼 3년 차가 되었는데도 아이 가질 생각을 하지 않자, 나의 엄마는 물고기 같은 거 키우지 말고 애를 낳아 키울 생각을 하라고 계속 재촉했다.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살고 계시길래 일정 부분 도움을 바라기도 했지만, 나의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엄마는 미리부터 가능성을 칼차단하셨다.

"엄마는 애기 못 봐줘."

엄마도 일을 하셔야 했기에, 몇 달 쉬시다가 또 직장을 구하셔야 한다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니, 자기 자식 자기가 키우는 게 당연한 건데, 바라는 게 잘못된 마음이라 생각은 했다. 생각은 그렇게 하지만 인간은 비교를 통해 판단하는 동물이므로 주변 사람들을 보면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감사한 일은 아직 엄마에게 내가 용돈을 드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힘에 부치겠지만 엄마가 아직 직장생활을 하시기에 경제적 부양의 시점이 연기되었다.


나는 결혼할 때부터 시부모님이 안 계셨기에 내 아이는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라는 그 개념이 없다. 바깥 '외'자는 너무 서운한 수식어다. 그래서 외갓집밖에 없는 아이에게 '외가'가 엄마 쪽 부모라는 건 알려주지만, 평소에는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르게 놔둔다.


어릴 적부터 외가와 왕래가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경북 시골에서 대구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나서부터 우리 가족은 늘 아빠의 부모님 댁 도보권으로만 이사 다니셨다. 부모의 속을 많이 썩이는 자식이셨던 아빠라서, 명절마다 우리 남매는 조부모와 친가 친척들의 왠지 모를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 반대로 외갓집은 너무 멀었다. 무려 제주도였다. 엄마는 제주인으로 살다가 아빠와 결혼하고 육지인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서 3년 정도만 제주도에서 살고, 육지 생활을 했기에 기억도 나지 않는 제주도였다. 이십 대 후반까지 내가 제주도 외갓집과 일가친척을 만나러 비행기에 탄 적이 단 한번뿐이다. 일곱 살, 미취학 아동일 때 엄마가 큰 마음먹고 비행기를 태워 주셨다. 그 후로 비행기 탈 일이 없었다. 돈 때문이다. 시골로 외할머니가 어릴 때 며칠 묵고 가신 게 기억난다. 이모도 나의 외사촌들을 데리고 오셨었다. 외사촌들은 많았지만, 같이 자라나면서 보지 못했기에 다 크고 성인이 되어서야 서먹한 얼굴로 어렴풋이 들었던 이름과 대조하며 만났다. 엄마는 얼마나 외롭고 고단한 시집살이를 했을까. 내 편이 하나도 없는 사회에서 말이다.


어린 시절, 아빠와 살기 힘들어 집을 나갔었던 엄마는 제주 친정에서 출가외인으로써 다시 육지로 돌아가라는 설득을 받고 일주일만에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왔었다. 엄마 편이 있는 곳으로 갔지만 거기에도 엄마 편은 없고 현실만 있었다. 그에 비하면 얼마나 외가 중심의 사회가 되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제주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학교를 결석하고라도 따라갈 생각을 못 했다. 나와 동생들 비행기 표까지 다 생각하면 우리 형편에 어려울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생각하며 홀로 우시는 걸 보았는데도 같이 빈소에 갈 생각을 못했다. 외할머니를 두어 번 밖에 못 본 상태라 정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들은 대체로 외동이거나 한 두 명의 남매뿐이다. 우리 부모 세대에 비하면 6~7인분의 권리와 사랑을 응축해서 받고 있다. 11살짜리 아들은 너무 외롭다며 할머니와 이모와 같이 살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며칠 전,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살자며, "저는 사람이 북적북적해야 안정감을 느낀단 말이에요!" 하고 떼를 쓰기도 했다. 엄마는 아직은 엄마의 자유와 '혼자 '을 좀 더 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할머니를 지금처럼 간절히 찾지 않을 텐데 말이다.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시부모와 함께 살며 불합리한 차별과 마찰을 경험하는 가정이 있지만, 40대 초반인 내 주변에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더 이상 계급에 따라 복종하지 않고, 불합리를 '참지 않는' 분위기다. 반대로 친정 부모, 특히 친정어머니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에 휘둘려 내 아이의 아이 육아까지 하느라, 분명 보람되고 사랑스러운 일이기도 하겠지만, 신중년과 노년의 여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손주 봐주는 엄마는 빨리 늙더라."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식이 경제적 여건을 갖추어 부모의 돌봄 수당을 충분히 챙겨 주는 가정이 있는 반면, 손주봐주는 활동이 무료봉사인 경우도 많다. 조부모로서는 확실히 손해 보는 일이다.


요즘은 서울시와 경남 쪽 지자체에서 월 40시간 이상 돌볼 시 조부모에게 주는 '손주 돌봄 수당 제도'도 있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지원금도 확실히 내 아이가 출생할 10년 전 당시보다 엄청나게 높다. 그만큼 출생률을 높이기 위한 정부의 지원이 확연히 늘어났다. 결국 여성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 여성으로 존중받고 하고 싶은 것도 예전보다 많이 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어릴 때 딱 한번 갔었던 제주도 조천 외갓집은 TV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종종 촬영장소로 등장한다. 바닷가 옆 잔디가 있는 집이라 정말 끝내주는 입지와 경치를 자랑한다.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 집과 외가친척에 대한 추억을 더 많이 쌓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쩐지 내 외갓집을 전 국민에게 빼앗긴 느낌이다.


코로나 시절 이후로 남편의 형제인 아주버님 댁과도 왕래가 적어졌다. 내가 외가 친척과 어릴 때 잘 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크듯이, 내 아이는 친가 사촌들과의 왕래가 적어 친하지 못했던 지금 시절을 커서 아쉬워할지 모른다. 이번 명절엔 아이의 친가 쪽에도 좀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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