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강화도에서 친구네 가족들과 같이 ‘알밤 줍기’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낮은 지대에 밤나무가 심겨 있고 언덕 위에서 손을 뻗으면 금방 딸 수 있는 지형이었다. 비탈에 심긴 모습이며 둥치가 제법 두터운 것을 보고 나는 추억에 빠졌다. 그 나무들은 ‘우리 밤나무’를 많이 닮았었다.
30여 년 전, 나와 남동생이 우리 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을 때였다. 마당 너머에는 개울이, 그보다 먼 곳엔 고추밭이 보였다. 그리고 좀 더 먼 곳에 밤나무가 군집된 앞산을 하릴없이 보고 있었다.
“어? 누나, 저기 차 올라간다. 못 보던 차다.”
앞산 중턱으로 나 있는 황토색 굽은 길에 파란색 트럭 한 대가 올라가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동네라 외지인의 차가 보이니 눈에 띄었다. 그러더니 밤나무 비탈 아래 멈춰있다. 부분적으로 나무의 물결이 일렁인 지 십 분이 넘어가자, 손수레에 돼지 사료를 붓고 계시던 아빠가 앞산 쪽을 힐끗 본 뒤, 조용히 우리를 불렀다.
“야들아, 저까지 뛰어 올라가서 저 사람들 밤 못 따가게 해라. ‘이거 우리 밤나무밭인데요’라 카고 온나. 다 털어가겠다.”
“저게 ‘우리’ 밤나무라고요? 왜 우리 거예요?”
금시초문이었다. 우리 집과 외양간, 돼지사육장과 연결된 밭은 알겠는데 산에도 주인이 있다는 건 몰랐다. 게다가 우리 것이라니. 집과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 앞산 중에서 밤나무 군락이 있는 땅만 추가로 같이 샀다고 하셨다. 심지어 아빠는 해마다 거름을 지고 이십 분 정도 산에 올라갔더랬다. 아빠가 ‘우리 밤나무’라고 말씀하신 순간, 나는 처음으로 ‘우리 것’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그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지켜야 할 가족의 터전이었다. 그동안 엄마가 밤을 삶아 주면, ‘밤이구나’하고 먹었다. 이제 밤나무라는 재산이 생겼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저 밤나무에서 해마다 열릴 밤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의 눈은 빛났다. 국민학교 1, 2학년 아이들의 가슴에 사명감의 꽃이 폈다. 아빠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우리를 움직였다.
우리는 ‘이거 우리 밤나무밭인데요’ 하고 말하러 출동했다. 급한 대로 구겨 신은 신발 뒤꿈치에 검지를 넣어 펴가며 마저 달렸다. 개울길을 돌아가 앞산이 시작되니 뛰어가는 속력이 더뎌졌다. 하지만 걷지 않았다. 올라가는 중에도 밤나무 아래 트럭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한 그루가 바람결이라 하기에는 너무 과하게 흔들렸다.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지만, 나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동생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니가 말해라.”
“아니, 누나가.”
“니가.”
“너거도 밤 줏으러 왔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아…. 그게요. 있잖아요…. 이거 우리 밤나무인데요?”
“너거 거라고?”
“네! 아빠가 여기 있는 밤나무밭 전부 다 우리 것이라 했는데요?”
‘전부 다’라고 말할 때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 동생도 거들었다.
“아빠가 있다가 돼지 사료 주고 여기 온다고 했는데요!”
트럭을 타고 온 부부는 서로 난감한 기색을 주고받더니
“주인 없는 밤인 줄 알았더마, 써 붙이 놓든가 하지. 미안하다.”
하시고는 털어놓은 밤을 그대로 놔두고 차에 올라탔다. 트럭 짐칸에 밤을 까기 위한 집게며 적당히 짧은 장대, 양파망 같은 게 있었다.
꽁무니를 빼고 가는 트럭을 보자마자 동생과 나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집까지 뛰어 내려가서 아빠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빠! 우리가 알밤도둑 물리쳤어요!”
자초지종을 들으신 아빠의 얼굴은 싱글벙글하며 ‘잘했다.’라고 하셨다. 남이 털어놔 준 우리 알밤들. 예상보다 수확이 앞당겨진 듯했다. 아빠가 사료를 주고 와서 몇 가지 기구를 챙겼다.
“밤 줍자. 한번 가보자.”
기다렸던 아빠의 한마디를 듣고 마루에서 놀던 우리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운동화를 다시 한번 발에 꿰어 신었다. 초록 칠의 코팅 목장갑을 끼니 장갑 끝부분은 손가락이 닿지도 않고 불편했다. 이제 은색 밤 집게를 하나씩 받고 밤나무 아래에 도착해 보니 그냥 떨어진 밤송이도 있고, 아까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장대로 쳐서 떨어뜨려 놓은 밤들도 제법 많았다. 고슴도치 스무 마리 같았다. 밤송이가 내 머리 옆으로 툭, 떨어지면 아찔하고 짜릿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피하기 게임이라도 하는 듯이.
엎어져 있는 가시 밤송이를 집게로 뒤집어 보면 빈껍데기였다. 정작 알밤은 근처에 아무렇게나 툭 뱉어져 있었다. 그런 것은 오늘 딴 것이 아니었다. 벌레들이 이미 맛을 봤을 것이다. 가장 탐스러운 밤송이는 연둣빛이 섞여 있는 연한 황토색이다. 그런 걸 발로 벌려 까면 송이와 붙어 있던 밤 꼭지는 연한 색이고 짙은 갈색의 밤껍데기가 윤을 내고 있었다. 아빠가 나무를 털어, 활짝 열린 밤송이들을 떨구어 주셨다. 비탈이 가파르니 기우뚱한 자세다. 신발 사이에 밤송이를 넣고 까는 게 불편했다. 벌어진 송이의 양 끝을 신발로 벌리며 은색 집게는 모아 쥐고, 밤과 밤사이를 비틀면 알밤이 신발 주위로 나지막하게 발사되었다. 큰 밤나무에서 점점 많은 밤송이가 떨어져 흔하게 되자 이제는 무조건 신나게 밤송이에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잘생긴 밤송이를 고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알밤이 많이 들어있는 밤송이를 발견하느냐 대결하다가 네 개가 든 밤송이를 남동생이 들이밀면, 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박박 우겼다.
“많이 들어있는 거 말고, 더 큰 알밤 찾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밤을 신발로 벌려 까는 게 계속되자 슬슬 엄지발가락이 쓰렸다. 동생이 불러서 고개를 돌리다가 신발이 어긋났다. 합성피혁을 거뜬히 뚫고 들어온 밤송이 가시. 점점 수확의 기쁨이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변질되었다. 이로써 우리도 이 밤나무밭을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지쳐갔다. 노동은 그만하고, 놀이다운 걸 하러 가고 싶었다.
“힘들어요. 인제 그만 까고 싶어요.”
“그라믄, 이 많은 알밤을 다 버리고 가잔 말이가?”
해가 넘어갈 때쯤 커다란 양동이 두 개에 반씩 채워 들고 터덜터덜 내려왔다. 팔이 조금 더 길어진 듯도 했다. 노동의 존엄성은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힘든 걸 아는 데서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엄마가 훗날 하시는 말씀이 밭농사에, 돼지를 치시느라 알밤이 열려도 매해 따러 갈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좀 커서 자기 몫을 했는지 평년보다 더 많은 알밤을 담을 수 있었다.
엄마가 밤을 삶아 주셨다. 과도로 반을 잘라서 티스푼으로 파먹는 건 또 다른 재미였다. 누가 얼마나 속을 깨끗하게 긁어먹는지 치열하게 내기했다. 삶은 알밤은 아직도 많고, 이긴 사람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서로 더 깨끗이 긁어먹으려다 속껍질의 아린 맛에 인상이 구겨졌다. 기왕 같은 힘을 들여 먹는 거라면 더 굵은 밤을 고르는 것은 당연했다. 고르고 고른 굵은 알밤을 쪼개보니 쌍둥이 밤이 나왔다. 쌍둥이 밤은 처음에만 신기하지, 여러 번 보게 되니 그리 달갑지 않았다. 속껍질이 쌍둥이 밤 사이를 판막처럼 막고 있어 먹기가 더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동생이 억! 하고 씹힌 것을 뱉었다. 밤벌레 몸체 일부가 밤의 속살과 함께 뱉어져 나왔다. 나는 꺄하하 웃으며 고소하다는 듯 놀려댔다.
밤을 너무 많이 따서 이웃에 나누어주고도 많이 남았다. 마당 한쪽에는 돼지우리를 짓고 남은 시멘트 포대, 모래가 동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빠는 밤을 모래에 파묻으러 가자고 하셨다.
“밤 심어요? 그러면 마당에 밤나무 나요?”
“심는 게 아니라 묻는 거다. 이렇게 모래에 묻어 놓으면 햇볕도 막고 며칠 더 보관하기 좋거든.”
며칠 뒤에 또 한 무더기 파서 삶아 먹었다. 그리고 마당의 모레 동산에서 몇 개는 용케도 잘 숨은 것인지 잊힌 것인지 비를 먹고 겨울바람을 막아 이듬해에 나란히 다섯 개의 밤나무 싹과 잎이 돋아났다. 아빠는 그것을 돼지우리 뒤편에 옮겨 심으셨다. 만약 그것이 자라면 힘들게 앞산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밤을 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우리 밤나무’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당당함이 어디서 왔을까? 그건 돈으로 산 땅에 대한 권리 의식이 아니라, 땀으로 일군 밤나무밭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저 혼자 자라는 줄 알았던 밤나무 군락을 무심하게 돌보았고, 일곱 채의 돼지우리를 몇 년에 걸쳐 직접 지으셨다. 아빠는 평생 ‘우리 것’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아빠에게 소유란 그냥 갖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었고, 우리 것을 지키고 키우는 것이었다. 힘든 양돈과 농사일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밤을 수확했다. 모래에 밤을 묻고, 이듬해 모래 속에서 싹튼 묘목을 기름진 땅에 옮겨 심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나 역시 내 일, 내 집, 내 책, 이런 ‘내 것'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빠에게 배운 것은 단순히 밤 줍는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훗날을 준비하는 법이었고, 가족을 위해 땀 흘리는 법이었다. 강화도 밤나무 아래에서 나는 그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노동으로 가꾼 우리 것을 당당하게 지켰던 모습, 그리고 나도 지킬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다짐했다. 내 아이에게도 우리가 함께 일군 것을 당당히 가질 자격을 물려주고 싶다. “이건 우리 거야.” 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