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학년 때인 듯하다. 우리가 했던 농사 중에서 크게 3가지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벼농사 600평과 케일밭 600평, 고추밭 1,600평이다. 재배 시기는 해마다 달랐다. 케일은 가끔 녹즙기에 당근과 함께 갈아 마시기도 했지만, 몇 번 되지 않는다. 무농약을 알아보고 벌레가 숭덩숭덩 파먹은 억센 케일의 원래 용도는 돼지에게 주는 특식이었다. '케일 먹인 돼지'의 육질은 언제나 A+ 등급을 받았다는 엄마의 설명이다. 온통 초록 물결이었던 드넓은 고추밭에서 고춧잎 솎아내는 것도 보았고, 벌레가 파먹은 걸 보고 매운 걸 잘도 먹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도 빨갛게 익은 고추 따는 걸 돕기도 했다. 큰 목장갑에 제법 먼지가 묻어났다. 수확 후 기억이 강렬했다. 뒷집 아저씨네 소유의 건조기실이 있었는데, 담뱃잎이나 고추를 말리는 용도였다. 우리의 통통한 고추들도 그곳에 들어갔다가 꺼내니, 건조하고도 광택이 있는 진한 빨간색을 하고 나왔다. 내 키를 따라올 듯 한 마대자루에 가득 담긴 고추를 다음 날 아빠의 2.5톤 트럭에 실어 5일 장이 서는 면내로 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전에 고추들은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뒷집에 사는 언니랑 놀고 있다가 의아한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 집과 그 집 사이 공터에 자루들을 세워두고, 드럼통 장작불 속으로 고추를 한 움큼씩 던져 태우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재산이 불에 타고 있었다. 나는 달려갔다.
"아빠! 왜 고추를 다 태워요?"
아빠는 왼쪽 가슴 주머니에서 '솔담배'를 한 개비 꺼내 피우고 있었다. 고추를 던진 불길 위로, 그리고 아빠의 입에서 모두 연기가 나고 있었다. 엄마는 눈이 매운지 눈물을 훔치고 코를 조금 들이마시며, 역시 고추를 불에 던지고 있었다.
어린 입맛에 고춧잎무침은 별로 맛있는 반찬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늘 아껴 쓰던 게 고춧가루였었다. 김치와 조림, 무생채 등에 많이 들어가는 식재료로 심상치 않은 불장난을 하는 것을 어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불질러요?" 다시 물으니 아빠가 마지못해 대답하셨다.
"이게 한 근에 400원이란다. 400원 갖고 뭐 하노?"
뭐 하지, 생각해 보니 쭈쭈바 2개를 사 먹을 수 있었다. '빠삐코'라던가 '스크류바'가 하나에 200원 했으니까. 한 근에 1,700원 하던 고추가 파동으로 1,300원, 700원으로 떨어지더니 급기야 400원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럼 400원이라도 받고 팔던가 우리가 먹으면 되지, 왜 다 태워요?"
"속상해서 안 그러나."
엄마의 대답을 들었지만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불길 앞에서 눈을 가늘게 뜬 아빠는 한 갑에 200원 하는 제일 저렴한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고, 불 앞에서 모든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엄마는 부은 눈을 하고서 기침했다.
1년 농사 과정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밭을 갈고, 흙에 직접 만든 거름을 먹이고, 이랑을 만들고, 불룩 나온 흙 위로 까만 비닐을 덮고, 삽으로 구멍을 뚫어 고추모종을 심고, 학교 다녀오면 어느 날은 약을 쳤다며 고추밭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작은 고추를 솎아내고, 몇 차례에 걸쳐 익은 순서대로 고추를 땄다. 건조기계를 빌려 쓰면서 얼마간의 전기를 썼을 것이고, 꼭지를 따가며 방앗간인지 도매상인지에 가서 가격을 들었을 것이다. 1년 동안 농사를 짓고 나서 모종값이라도 건졌을까. 방앗간에서 고춧가루를 갈고 나면 1년 치 노무비와 비료값을 제하더라도 정말로 마이너스 농사였다. 그 해의 다른 농부들과 마찬가지로 눈치게임에 실패한 것이다. 9시 뉴스에서도 고추 파동 이야기가 들렸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잔인했다. 화가 난 아빠는 안 판다며 도로 2.5톤 트럭에 싣고 돌아왔을 것이었다. 그래도 아까웠다. 사려면 다 돈인데, 내년에라도 쓰면 될 텐데.
나는 자본을 소각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이 가격에 팔 바엔 차라리 안 판다, 아빠는 농부의 자존심을 태우는 의식을 치른 것 같다. 부모님 2명의 1년 치 연봉은 얼마였던 걸까.
몇 해 전에 회사 경영상태가 좋지 못한 곳에 입사했었다. 시간대는 아이 케어하기 좋은 시간대 근무로 협의가 되었지만, 직원들의 급여를 한두 달 밀린 상태라 했다. 그러면서 경리회계직인 내 월급은 미루지 않고 주겠다는 대표님의 말씀을 믿고 입사했다. 하지만 실상은 훨씬 심각했다. 모두들 어떤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하는지, 대표님은 어떻게 수지도 안 맞는 경영을 계속하시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지시에 따라, 급여일에 내 급여만 집행되니 상사와 다른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눈치 보였다. 그러다 결국 2년 이상 일할 때쯤엔 내 급여도 두 달 이상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3달만 밀려도 사직서를 쓰는데 다른 직원들은 어떻게 버텼을까.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그 산골짜기에서 어떻게 버티셨을까. 농사일 1년 연봉은커녕 재료비도 건지지 못하고 불속에 던져버린 생산물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고추 농사를 짓지 않았다. 밭은 황폐 해졌다. 집 가까운 한쪽 귀퉁이에 반찬용 부추와 오이, 쥬키니호박을 심어 때가 되면 밥상에 올라갔다.
부모님에게 오직 믿을 건 돼지뿐이었나 보다. 한 번에 10마리 정도를 낳는 돼지는 번식력이 좋았다. 허약한 몇 마리를 빼고는 잘 자라 주었고, 생애 주기마다 다른 사육장으로 돼지몰이를 하는 날엔 온 가족이 제법 땀을 흘렸다. 하지만 돼지마저도 파동이 날 때가 있었다. 돼지를 90kg(24관)가 될 때까지 키우려면 사료는 몇 포대가 필요할까. 부모님의 자부심이었던 '케일먹인 A+등급의 돼지'는 12만 원에 팔렸다고 했다. 돼지는 계속 불어났다. 사료빚이 계속 불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