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돼지 여섯 마리와 함께 산으로 간 가족
아빠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기까지 오래 걸렸다.
아빠를 팔아먹는 것은 아닐까. 부모를 욕보이는 것은 아닐까.
아빠는 아팠고, 나빴고, 아프시다. 그래서 나도 아프다. 왜냐하면, 아빠를 빼고서는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도무지 꺼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종종 아빠를 잊는다. 잊어야 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와 평생 함께 나눈 대화가 얼마나 될까. 몇 번 안 되는 아빠의 말씀이, 내가 살아가면서 종종 나침반이 되고 있는 걸 발견한다.
부모님에게서 난 무엇을 배웠을까. 아빠에게서 좌절과 도전, 가능성, 살려 내는 법을 배웠고, 엄마에게서 무조건적인 응원과, 대수롭지 않음과, 살아 내는 법을 배웠다. 아빠는 자주 무언가를 휘둘렀고 엄마는 막아냈다. 각박한 삶을 엄마는 잘도 버텨내신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세 살이던 때에, 제주도에서 경상북도 한 산골로 삶의 터전을 옮기셨다. 대구에 사시던 아빠는 양돈업을 배우기 위해, 성인이 되자마자 돼지의 고장인 제주도로 가서 돈사에서 일을 배우셨다. 육지에서 나고 자랐던 아빠는, 섬에서 나고 자랐던 엄마와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나는 서로 다른 태생의 부모님이 20대 초반에 만들어놓은 결과물이다.
나는 세 살까지 제주도에서 살았다. 사진은 있지만 당연하게도 기억은 없다. 직접 양돈사업을 하기 위해 아빠는 새끼돼지 여섯 마리를 사 오셨다고 한다. 둘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셨다. 9년 후 450여 마리로 불어난 개체수를 생각해 보면, 한 시도 쉬지 못했던 부모님의 삶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아빠는 시골에서 엄마와 함께 케일과 고추, 나무를 심어 키웠다. 농부의 일이 흔히 그렇듯이 농작물의 파종부터 수확까지의 모든 일을 해내셨다. 그리고 본업인 양돈업은 더 잦은 손길이 필요했다. 돼지들의 삶과 죽음에 아빠는 '신적인 존재'였다. 출생과 도축, 병과 치료, 교미와 출산, 사료급여와 집청소, 돼지우리 축조와 유지보수까지 나는 다 보고 자랐다. 돼지에게 아빠는 수의사이자 저승사자였다.
아빠가 소주를 드시는 것은 우리 가족의 불행이었다. 가족으로서의 피해가 극에 달하면, 아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나 다시 일어나신 아빠가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시는 걸 보면 마음이 바뀌었다. 안 된다고, 아빠가 없는 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사건들은, 아빠와 연결되어 세포에 각인되어 버렸다. '다리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을 순전히 믿고 가슴깊이 슬퍼했던 어린 날에는 절대로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던 혈육의 연결고리였다.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