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하며 살아온 불자

by 나예스

아빠에 대한 첫 기억은 여섯 살 여름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세 살이던 때에, 돼지 여섯 마리를 사 와서 양돈업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9년 뒤에 그 여섯 마리는 약 450마리로 불어났다. 돼지뿐만 아니라 닭도 스무 마리가량, 나중에는 암소도 한 마리 키웠다. 우리 집 마당에 뱀들이 종종 출몰했다. 한 날은 아빠가 뱀 집게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지 않냐고 내게 자랑하셨다. 굵은 철사와 둥근 나무 기둥으로 만든 뱀 집게를 흔들어 보이시며 제작 원리를 내게 늘어놓으셨다. 그 집게로 뱀을 잡아서 여섯 살인 내 키만큼 깊은 ‘뱀 항아리’에 넣는 것이다. 아빠가 가시고 나서 벽돌을 밟고 올라가 덮어둔 뚜껑을 조금 열어보았다. 깊은 항아리 안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뱀들은 벗어놓은 허연 허물 위로 서로 엉켜 꿈틀대고 있었다. 이웃집 아저씨는 뱀술이나 벌술도 담가 드시곤 했지만, 순수 소주 파였던 아빠는 뱀을 그저 항아리에 가둔 것으로 끝이었다. 항아리에 뱀을 잡아넣으면 그 후는 어떻게 되는 건지, 서로를 잡아먹는 것인지 썩어 없어지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저 안에서 죽는 거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했다. 어쩌다 우리 마당 앞을 지나가게 되어 변을 당한 녀석들이 불쌍했다. 외진 산골 마을은 4킬로미터를 가야 겨우 보건소가 나왔다. 병원은 도시에나 있는 것, 응급 상황에서 빠른 조치가 어려운 시골에서 뱀에 물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 들은 나는, 뱀들이 사람을 물지 못하는 곳에 갇혔다는 사실에는 크게 안심했다.


그날도 아빠는 새로 만든 뱀 집게로 마당을 가로지르는 초록과 주황이 섞인 뱀인 유혈목이(꽃뱀이라 불렀다)를 잡아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몸을 뒤틀어 집게 사이를 빠져나가 버린 뱀이 마당에 지그재그로 도망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적인 뱀이 도망치는 것을 놔둘 수 없었다. 그대로 쫓아가서 밟았다.

“아빠! 뱀!”

“어어! 거기 발 띠라. 도망가라!”

의기양양하게 외쳤던 나는 하얗게 질린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다시 내 발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끼고 얼른 저만치 도망쳤다. 아빠가 자랑스러워 마지않던 ‘뱀 집게’도 통과한 뱀이 맨발에 신은 슬리퍼로부터 빠져나가다가 목을 틀어 내 발을 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얼른 점프하듯이 도망쳤다.

‘아, 나 죽을 뻔한 거구나!’

아빠는 조심성 없는 나를 다그치면서 괘씸한 뱀을 다시 집게로 잡았다.

“겁도 없이 어데!”

마당을 지나간 죄로 뱀의 두 번째 탈출은 실패했고, 항아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게 아빠의 뱀 집게는 나에게 인명 구조 물품으로 각인되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답게 나는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떠올려 본 아찔한 순간이었다.


엄마는 종교가 없었지만 아빠의 종교는 불교였다. 가끔 절에 가서 며칠씩 수련도 하고 왔다. 훗날 학교에서 가정환경을 조사하는 종이를 가져오면 불상도 보지 못한 우리들의 종교란에 당연하게 ‘불교’로 적혔다. 아빠의 종교가 불교이니 우리도 불교라는 것이다.


내가 국민(초등) 학교 1학년 무렵부터 아빠가 소주로 한을 풀기 시작했다. 돼지 사업이 잘 안 풀렸던 모양이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아빠가 무려 3주 동안 곡기도 끊고 2리터에 가까운 ‘금복주’라는 소주 됫병과 물 만을 들이켜는 모습을 보았다. 마을 어르신들은 아빠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아빠를 마시는 거라고도 했고, 술귀신이 붙어서 그렇다는 말도 했었다. 아빠가 밥상을 자주 뒤집어엎었으므로 그나마 남아 있던 유리컵과 사기 밥그릇마저 깨져버려서 그 후로는 우리 집엔 스테인리스로 된 식기만 남았다. 엄마는 가끔 우리를 이웃집으로 피신시켜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게 부탁했다.


약 2주간 큰 소동이 몇 차례 일어난 뒤에는 아빠에게 구토 증상이 찾아왔다. 눈동자에는 몸살을 앓고 있는 정상인의 눈빛이 돌아왔고, 작은 대야에 토를 한 뒤 나에게 설탕물을 타 오라고 하셨다. 설탕 한 수저에 보리차를 부어서 저어 드리면 그걸 마시고 또다시 구토하기를 반복하고 이틀이 지나면 아빠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단어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참회에 들어가셨다. 그러다가 엄마의 속도 모른 채 훌쩍 다른 지방의 커다란 절에 가서 며칠씩 명상과 수도를 하고 오셨다. 그동안 돼지 몇백 마리는 엄마 혼자 돌볼 수밖에 없었으니 그 피곤과 난감함이 오죽하셨을까. 엄마가 돼지우리에서 고단하게 돼지를 치는 동안 나와 남동생은 다시 활기를 되찾고 마음껏 까불었다.


아빠의 술버릇은, 평소에 한 잔도 입에 대지 않다가 동네 어르신이나 영농후계자 모임에 가서 딱 한 잔만 하라 권유받았을 때,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날로 드러누워 술만 마시기를 열흘에서 스무날 반복하며 폭력성을 보였다. 때가 되면 갑자기 구토를 시작하고, 관세음보살을 외다가 마음을 수양하러 절에 며칠 다녀오면 기나긴 술 루틴이 끝나는 것이었다.


5학년 여름, 돼지 사료 빚과 아빠 친구 보증 빚 때문에 일곱 개의 돼지우리와 땅을 통째로 팔아 대구로 이사하게 되었다. 아빠의 종교와 상관없이 나와 동생들은 교회를 다녔다.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가정환경조사서 종교란에도 더는 불교라 적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 첫해 어느 일요일,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던 나는 그날도 예배에서 ‘아빠 술 안 마시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고 동생들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술이 덜 깬 상태였음에도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희미하게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새어 나오는 위치는 안방이 아니라 남동생의 방이었다.


의아하게 여겨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니 아빠가 피바다에 누워 있었다. 창백해진 아빠 옆에는 한때 돼지 잡는 도구였던 날카로운 칼이 놓여 있었다. 난 그 장면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거실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피가 도대체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다가갔다. 자해한 거라면 손목이나 목일까 살폈다. 그쪽은 아니었다. 아빠는 우리가 온 줄도 모르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지만 벗은 속옷 바람으로 ‘관세음보살’을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떨며 근처에 사는 할머니 댁에 전화를 걸어 울면서 아빠가 피투성이란 말만 반복했다. 할머니 전화를 끊고 나니 중얼거림을 멈춘 아빠가 놀란 듯이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려다 휘청했고 그때 양쪽 허벅지 안쪽에서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칼로 양 허벅지 안쪽을 찔러 피를 방안에 흥건하게 흘린 것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왜?


아빠는 다시 다리를 절며 몸을 벗고 난 뒤 할머니가 오시기 전에 급히 샤워하고 볼일도 보셨다. 차마 부모에겐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었나 보다. 방엔 여전히 피투성이였고 밟은 곳마다 발자국이 생겼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 일을 계기로 남동생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피를 보면 쇼크가 오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아빠가 샤워하며 급히 몸에 흐르는 피를 수습하는 동안에 울면서 나는 피를 닦아 짜내고 다시 닦았다. 섬뜩하게 생긴 칼도 얼른 숨겼다. 그 옆에 이런 쪽지가 놓여 있었다.

‘소 1마리, 돼지 40마리, 닭 15마리, 뱀 10마리.

이 피로 죄를 씻어 주십사, 관세음보살.’


그 쪽지를 본 순간, 아빠는 뱀만 항아리에만 가둬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자신의 죄책감과 외로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마음을 심연의 항아리에 그렇게 오랜 세월 눌러 담고 있었나 보다. 살생해야 했던 불교 신자. 어릴 적 나를 뱀으로부터 구해준 아빠는, 정작 자신을 구하는 일에 오래도록 서툴렀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치는 듯했던 이상한 의식은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아보려는 의지였을까. 아빠를 이해하게 된 건 아니지만, 평생 과묵했던 아빠의 괴로운 속내를 한 번쯤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화, 목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 : 돼지의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