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무렵, 시골 면내에 미군들이 군용 트럭을 타고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트럭 짐 싣는 칸에 네다섯 명쯤 옹기종기 앉아서 지나가는 광경이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아빠! 오늘 미국 사람 봤어요!”
“웬 미국 사람?”
“군인들이요!”
“탱크 탔더나?”
“아니요, 트럭에 다섯 명쯤 탔던데요, 쳐다보니까 우리한테 '헬로'라 했어요!”
“잘 들어라잉? 다음번에 '헬로우' 카거들랑, ‘하이! 헬로우!’ 카면 된다잉? 그게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는 소리다.”
“아, 하이! 헬로-우! 크크큭.”
난생처음 써보는 영어 회화가 괜히 웃기고 부끄러웠다. 너무 없어 보이는 한국식 발음이었다.
“또 미국 군인 아저씨들한테 ‘기브미 쪼꼬렛, 기브미 쪼꼬레또’라 카면, 쪼꼬렛도 줄 기라. 쪼꼬렛 받으면 ‘옛 설! 땡큐!’라 카면 된다.”
우리는 하루 용돈 삼백 원을 쥐고 왕복 8 킬로미터를 걸어 등하교해야 했으니, 늘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삼백 원이면 ‘빵빠레’ 하나 사 먹으면 끝나는 금액이었다. 어묵 하나 사 먹으면 백 원이 남는다. 그 돈으로, 낱개로 파는 땅콩캬라멜 다섯 개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 아껴 먹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질리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 인사를 주고받으면 초콜릿을 받을 수도 있다니! 그건 우리에게 마법의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남동생은 다음날부터 느릿하게 달리는 미군 트럭이 보이면 쫓아갔다.
“누나! 온다, 저기 온다!” 표적이 우릴 향해 오고 있다.
“야, 기브미 쪼꼬렛, 알았제? 아니다, 헬로우 먼저라 캤다.”
우리가 다급하게 리허설을 하는 동안에도 천장이 없는 검은 차를 타고,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고 웃는 모습이 왠지 여유 있어 보였다.
차량이 워낙 느리게 움직이고 있어 공무 수행하는 건지, 훈련인 건지 아니면 드라이브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어렵지 않게 두 팔 높이 흔들며 인사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이! 헬로우!”
“Oh, Hello.”
오, 첫 번째 관문 통과! 파란 눈동자의 흰 얼굴 군인 아저씨가 인사를 받아주었다. 면사무소 앞을 지날 때 짓궂게 내 앞을 가로막아 앉았던 민방위 아저씨와는 달리, 이 외국인은 신사적인 느낌을 풍겼다. 왜냐하면, 이번엔 내가 그들을 막은 상황인데도 나의 인사에 화답해 주셨기 때문이다.
“저기요……. 기브미 쪼꼬렛, 기브미 초콜렛.”
“Chocolate, here.”
“와, 진짜 초코렛이다!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다, 옛 설! 땡큐, 땡큐우!”
얼굴이 온통 검고 흰자위만 빛나는 미군 아저씨가 얇은 비닐포장지로 감싸진 네모난 초콜릿과 초콜릿 맛 웨하스도 주셨다. 포장지도 고동색인데다, 흰색으로 온통 영어가 적혀있는 완벽한 미제 초콜릿이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면 육이오 전쟁 시절 국제시장 풍경인 줄 알지만, 구십년대 초반의 미군은 여전히 미제 초콜릿을 어린 초등학생에게 베풀어 주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엉터리 발음 회화를 받아주는 미군 차량은 없었다. 선량한 초콜릿 기증자를 다시 만나지 못하면서부터 영어 인사말은 자연스레 묻혔다. 대신 미군이 면내에 다니기 시작한 후 또 다른 변화도 생겼다. 우리 마을 입구부터 집에서 1 킬로미터 근방까지의 흙길에 못 보던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아빠. 집에 오는 길에 이거 주웠어요.”
나와 남동생은 집에 오는 길에 금색 쇠 막대를 여섯 개 정도 주워 왔다. 분필 두께에 길이는 엄마 새끼손가락 정도 되었을 것이다. 못 보던 물건이 길가 또는 밭에 마구 떨어져 있어서 소꿉놀이할 때 쓰려고 가지고 온 것이다.
“이거 총알이네! 어디서 났노?”
“총알이요? 무슨 총알이 이렇게 생겼어요? 집에 오는 길가에 많던데요.”
아침 등교할 때는 분명 안 보였던 탄피였다. 그런데 하교 후 마을 입구에서 깊숙이 들어올수록 날마다 다 쓴 총알을 줍게 되었다. 총알은 빠져나가고, 끝이 뭉툭하고 홈이 파여있는 쇠막대만 남아 있는 것이다. 아빠가 고물상에 탄피 한 개에 이백 원에 팔아봐야겠다며 분유 깡통에 그것을 축적했다. 마루 밑에서 손가락같이 긴 금속 탄피가 제법 모이고 있었다. 정말로 다 쓴 탄피를 사 가는 사람이 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우리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어 하굣길마다 양쪽 주머니를 불룩하게 채워 왔다. 집에 와서 주머니 안쪽을 뒤집어 우리를 부자 만들어 줄 탄피를 분유통에 넣고 나면 손과 주머니 안쪽에 검게 때가 묻었다. 우리 기대와는 달리 탄피를 모아놓은 통은 팔리지 않고 대청마루 밑에서 먼지만 쌓였다. 몇 계절이 지나고 미군은 우리 면내에서 철수했다.
아빠는 총알을 왜 모으셨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정말로 고물상에 팔 생각이었는지, 증거자료를 수집한 다음 민원이라도 넣으려고? 아니면 동네 어르신들의 밭을 우리가 청소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긴 하다. 우리가 학교에 있을 시간에, 산속에 있는 우리 마을 길과 논밭이 펼쳐진 오솔길에서 주한미군 병사들이 사격 훈련을 했다는 얘기였으니까. 밭농사하러 나오신 마을 어른들이나 행인이 있었다면 목숨이 걸린 일일 수도 있었다. 대구에서 ‘개구리 소년 사건’이 일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누가 잡아가도 목격자가 없을 한적한 시골에서 보호자 없이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오 학년 때까지 오 년 이상 그 길을 등하교하고도 납치나 다른 사고 없이 다녔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아빠가 가르쳐준 그 서툰 영어는 단순히 초콜릿을 공짜로 얻어먹으라는 조언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늘 일의 원리를 알려줬던 분이었으니까. 그 일은 모르는 사람에게 어린이의 순수함을 팔았던 최초의 영업활동이었다. 비록 ‘기브미 쪼꼬렛’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발음이었지만, 그 속에는 낯선 이들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용기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둘이라서 더 용감했고, 얼굴을 파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먹고 살 방법을 자발적으로 구했던 경험이자 타인과 소통하는 연습이었다.
계속 초콜릿 얘기를 하며 글을 쓰니 단 것이 몹시도 당긴다. 다시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지.
“Give me chocol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