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맞다

35일 차 : 건망증

by 나예스

이상하게도 나는 사소한 기억은 잘하고, 중요한 기억은 잊을 때가 많다. 특히 친하다고 느끼는 사이일수록 그 친구와 나눈 대화 저장을 잘 못했을 때가 있다. 이게 한두 번이면 "그럴 수 있지."라는 말로 넘어갈 텐데, 계속 반복하다 보니 상대에게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채감이 생겼다. "그때도 내가 말하지 않았나?" 하며 다시 상대가 설명해 주기 시작하면 나는 마치 처음 들은 것같이 집중해서 듣고, 부연 설명을 들을수록,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아, 맞다." 하며 자책하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이고, 자주 보면 나의 뇌는 아주 편안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친구와 함께 있었던 따뜻한 분위기나 미소, 배경 같은 것들이 기억나고, 정작 내가 물은 안부에 대한 답변은 임시파일에 저장된 것처럼 흘려 들었던 모양이다. 편안한 관계가 말을 흘려들어도 되는 관계는 아닌데. 분명 그 자리에선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휴대폰도 안 만지고 대화에 푹 빠진 것 같았는데, 그럴수록 기억을 못 했다. 그렇다고 일상의 티타임을 인터뷰하듯 메모하며 들을 수도 없었다. 티슈에 적어보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친할수록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특히 내가 대화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반복할 때 자주 봤던 친구에게 "너는 잠을 좀 더 자야 할 것 같은데"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밤 독서를 하기 위해 잠을 3시간에서 5시간 정도 잘 때 그런 건망증이 심해졌던 것 같다. 일상도 기억 못 하는데, 읽은 책은 잘 저장되었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6시간30분 이상은 자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상대를 편안하고 푸근하게 여기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그래서 자주 보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관계가 너무 일상이 되면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만나게 되는 듯해서 조절을 하게 된다. 아주 오래전 경험이지만, 갑자기 사랑에 빠졌을 때 보고 싶은 상대방의 얼굴이 도저히 기억이 안 났던 것과 혹시 비슷한 맥락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만남에 대해 더 잊어버리는 것 같다. '아, 맞다'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가고 싶다. 나에게 마음을 나누어 주고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더 잘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