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일 차 : 지갑
지갑의 목적은 현금의 정리정돈이었다. 수납력과 지갑 자체에서 오는 고급스러움이 현금에게 근사한 집을 지어준 것 같았다. 나중엔 지갑을 살 때도 카드 수납이 얼마나 많이 되는지가 더 중요해졌지만 말이다.
12년 넘게 가계부를 쓰고 있다. 회사나 집이나 가장 신경 쓰이는 게 현금이다. 카드는 발자취를 남기는데 현금은 훨씬 적은 돈인데도 잔액이 안 맞으면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카드를 쓸 때마다 휴대폰 웹으로 품목을 대략 기재해서 쓰는데 시장이나 마트에서 장을 볼 때는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서서 쓰거나 품목이 나온 영수증 사진을 찍어 파일로 첨부한다. 그래도 한두 달 지나고 보면 꼭 빠진 것이 있다.
카드 사용 알림 문자와 구매사이트를 보면 찾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현금이었다. 경조사비에 '0'을 하나 덜 붙여 쓰거나, 명절 전에 미리 현금 출금해서 용돈으로 쓴 것을 기재하지 않으면 장부에 현금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나왔다. 현금 사용의 출처와 행사를 되짚으며 남편과 머리 맞대어봤자 결국 내가 관리했으므로 기억해야 했다.
"가계부 꼼꼼히 쓴다고 썼는데..."
"자꾸 펑크 나면 니 용돈으로 멕궈."
열이 받쳤다. 가계부 쓰는 일만으로도 큰 일인데, 분명 허튼 곳에 쓴 게 아닌데 괜히 변명하다 보면 억울해진다. 그러다가 2년 전부터 가계부에서 '현금' 시재를 없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홀가분함에 날아갈 것 같았다. 내 개인 지갑에서 먼저 돈을 쓰고 가계부를 쓰면 내 피 같은 용돈을 쓴 거라 가계부 기입을 빼먹지 않았다. 공용 가계부에서 현금이 나가는 것이 아닌, 나에게 줄 돈으로 처리하면 되었다. 장지갑에서 공용칸과 개인 칸을 나눌 필요도 없고 동전도 거의 안 들고 다녀서 지갑이 잘 닫혔다. 오히려 카드는 입주민 카드나 도서관카드까지 많아져서 카드 꽂는 칸은 이제 한 칸에 두 장을 꽂지 않으면 헐렁해서 쑥 빠져버리기 일쑤였다.
지갑은 현금의 소중한 집인데 이제 장지갑도 카드지갑의 목적이 더 컸다. 지갑에 현금을 적게 들고 다녔더니 인심도 함께 다이어트가 되고 말았다. 갑자기 만나게 된 친구네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주려고 해도 지갑에 천 원짜리밖에 없을 때가 더러 있었다. 은행 CD기는 멀고 붕어빵 사 먹고 거슬러 받은 돈으로 쥐어주긴 너무 작은 돈이었다.
예전에는 동대문에 옷 사러 갈 때 현금을 두둑이 뽑아 들고 갔다. 그때는 지갑을 열지 않았다. 지갑에 있는 현금을 장삿속에게 노출하면 제 값을 받으려 할까 봐 여서였다. 당장 쓸 돈을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고 돈이 이거밖에 없음을 보여주면서 살듯 말 듯 가려다가 뱅글뱅글 돌면 연민 할인이 들어갔으며(애초에 웃돈으로 시작했겠지만) 흥정한 값에서 '현금 영수증 안 하고 현금가'로 하면 몇천 원이고 더 뺄 수 있었다.
돈에 대한 태도가 돈이 붙는 사람을 결정한다고 한다. 현금이 많아지면 돈에 그려진 위인의 얼굴과 방향을 맞추어 넣었다. 왠지 그래야만 돈이 자기 친구를 데리고 온다니까. 미신이라지만 왠지 행운을 기대하는 마음에, 한 방향으로 정리한 지폐를 넣었다. 가만 보자. 그렇다면 이황이나 이이 친구보다는 신사임당이나 세종대왕의 친구를 불러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작은 갈등이 일었다. 지갑에 큰돈만 가지런히 정리하고 작은 돈은 거슬러 받은 대로 넣어야 하나. 하지만 돈을 쓰면 잔돈을 거슬러 받으므로 필연적으로 잔돈의 수량이 많아지는 구조였다. 또 어느 누군가는 한 방향으로 맞추는 게 끝이 아니라고 한다. 머리부터 넣어야 한다는 부칙을 달았다.
그러면 신사임당이나 세종대왕이 물구나무서기 하는 거 아닌가? 돈은 쓸 때 기준이라며, 꺼낼 때 돈에 그려진 위인이 바른 자세로 나온다고.
요즘은 현금의 위력이 많이 떨어졌다. 마트에서는 문구사에서든 카드나 지역회폐 앱으로 결제하는 걸 보고 커서 그럴 거다. 어린 조카에게 용돈을 주는데 안 받고 영상을 보고 있을 때 조금 서운했다. 돈 주는 맛이 없었다. 친정에서 '애들은 돈을 몰라야 한다'라는 잘못된 미덕을 듣기도 했다. 아들은 나만큼이나 돈을 좋아하는데 누가 용돈을 주면 당장에 뛸 듯이 웃으며 감사하다고 하거나 때에 따라서 그 자리에서 세배를 해버리기도 한다. 명절 끝나고 아들 통장에 입금을 하러 가는데 CD기 줄이 풍년이었다. 도둑이 들어도 현금은 털릴 일이 없었다.
지갑을 잃을 걱정이 예전보다는 덜하다. 집 앞에 종일 택배 상자가 쌓여도 훔쳐가는 이 없는 것처럼 지갑을 털어봤자 현금은 적을 것이며, 카드사용은 추적이 용이할 것이다. CCTV가 곳곳에 있어서 그런 걸까. 남편도 지갑 두 번 분실한 이후부터 아예 지갑 없이 생활한 지 10년이 넘었다. 주머니에 후불 교통카드 기능이 있는 신용카드 한 장, 주민등록증 한 장을 들고 다닌다.
지금도 이미 휴대폰이 지갑인 세상인데 내가 할머니가 될 때는 "그때는 '지갑'이라는 곳에 돈을 넣고 다녔지."와 같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