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딸은 살림의 밑천이다. 내가 싫어하는 말이다. 답답한 사람이 한다. 어쩔 수 없이 일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 한다. 하지만 그 답답하고 눈에 밟혀서 하는 사람이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원해서 하는 건 아니다. 환경적 이유로 자식의 희생을 담보로 한 양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부모가 미안해해야 할 일이다. 내가 동생을 잘 돌본건 아니었다. 내가 알아서 놀고 알아서 큰 것처럼 막내 동생도 알아서 놀고 크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자란 게 엄마의 역할이었다.
엄마가 종일 식당일을 하시며 휴게 시간도 없이 한 달에 이틀만 쉬실 때, 얼마나 고단하셨을지 짐작도 안 갔다. 아빠가 몇 달마다 주기적으로 술독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만 일 하셨다면 엄마가 전업주부를 해도 좋았을 것이다. 몸에 익은 부지런함 때문에 집에 가만히 계셨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몸이 근질해서 일하는 것과 중고등학교 학비와 준비물 값을 대기 위해 일하는 것은 그 무게가 달랐다.
중학생인 나는 엄마가 종일 일하시는 게 안타깝기보다는 싫었다. 저녁밥을 차리는 게 싫었다. 설거지는 더 싫었다. 그래도 어떡해. 엄마가 일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살 생활비가 없다는데. 벼룩시장 신문이건, 음식점 유리문에 써 붙여진 '홀서빙 구함'을 보고 들어가거나 마음먹으면 바로 일을 시작하셨다. 엄마가 일하시니 학원도 다닐 수 있게 해 주셨다. 고등학생 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게 피곤했지만 학교와 학원을 다니느라 집안일을 덜 할 수 있는 점이 마음 편했다. 나까지 종일 집에 안 들어오니 동생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때는 아빠의 성화로 엄마가 낮 근무만 했던 것 같다. 막냇동생도 어렸고, 남동생이 밥을 잘 차려 먹었을 것 같지 않았다.
고등학생에게도 주말은 찾아왔다. 점심과 저녁, 두 끼였다. 그 나물에 그 밥, 아니 , 그 김치에 그 장아찌라고 해야 할지, 우리 집 냉장고에는 소시지나 햄 대신 묵은지와 마늘장아찌와 깻잎 김치와 축축한 멸치볶음이 있었다. 김치찌개나 동태찌개도 데우고 냉장고 들어가기를 3일 정도 하다 보면 곤죽이 되어 손이 가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냉장고 문짝에는 계란 떨어지는 날이 없었고, 베란다에는 감자와 양파가 있었다. 엄마가 시장에 다녀올 수 있을 때는 출근 전 아침 일찍 또는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 뿐이었으므로 싹 난 감자와 양파 키우기 세트처럼 파가 되고 있는 양파라 할지라도 그게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면 감자 양파를 넣은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계란 프라이와 먹을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밥만 차려 먹고 싱크대에 담가 놓으면 엄마가 밤 11시에 집에 오셔서 설거지를 하셨다. 날 잡고 쟁여 놓을 반찬을 만드시다 보면 새벽 1시를 예사로 넘기셨다. 엄마는 생계를 책임지는 죄로 밖에서든 집에서든 묵묵히 일하셨다.
아빠가 하루는 뜻밖에도 '엄마가 퇴근하고 오면 힘이 들 테니 설거지를 해 놔'라고 하셨다. 또 가끔은 아빠가 설거지를 하기도 하고. 주방에 들어가시는 아빠 모습이 낯설었지만 아빠가 엄마보다 더 많은 시간 집에 계셨으므로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는 아빠의 모습이 바람직해 보였다.
어느 주말, 그러니까 문제가 터진 날이었다. 아빠와 동생들의 밥을 차려서 먹고, 바로 시험공부를 해야 했다. 남동생은 공부에 관심이 나보다도 없어 보여서 설거지를 좀 해달라고 했다. 평소에는 곧잘 가위바위보를 해서 설거지 당번을 정했지만 이때는 부탁을 했고, 동생도 흔쾌히 해 주었다. 주방 새시를 닫고 설거지를 하는 동생 뒤로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와, 당장! 남자가 무신 부엌에 들어가노!"
"예?" 동생이 놀라 움츠러들었다.
"맨날 공부는 안 하고, 설거지만 할 기가?"
주방에 처음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빠도 설거지하신 적도 있는데 남자가 부엌에 들어갔다며 버럭 화를 내신 거다. 나는 고함 소리를 듣고 '저 시험 공부하고 있었어요'라는 액션으로 샤프를 든 채 거실로 나왔다.
"설거지할 사람이 니 뿐이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럼, 저뿐인가요?'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아빠, 저 시험공부해야 돼서 동생이 설거지해 준 거예요."
"그럼 야는 시험기간이 아니란 말이가?"
남동생이 퐁퐁칠을 하다 만 그릇을 넘겨받고 나는 분노의 설거지를 했다. 입밖으로는 한 마디의 분노도 내지를 수 없는 대신 눈물만 나왔다. 집에서 공부할 마음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집중하기란 더 어려웠던 내가 모처럼 이번 성적을 높이겠다고 결의를 다지며 시작한 시험공부를 이깟 설거지 때문에 방해받았다고 생각하니 속이 터졌다.
아빠가 조선에라도 다녀오신 걸까? 갑자기 남아선호사상이라니. 어릴 적부터 '이건 뭐예요', '저건 왜 그래요' 물어볼 때마다 잘 알려 주셨고, 기술의 원리와 자연의 섭리 같은 것도 알려 주고 했던 아빠가 느닷없이 성 차별을 한 이유가 뭐였을까. 한마디로 화딱지가 나셨던 것 같다. 자식 중 하나뿐인 아들이 시험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공부에 관심 없는 것이 못마땅하셨던 것 같다. 아빠가 남녀를 비교한 발언은 그 후에는 없었다. 사람 일은 참 모르는 거였다. 훗날 일반고에 들어간 나보다 공고 들어간 남동생이 내신으로 더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했었으니. 4년 제 대학도 아니었지만 총명하다며 기대했던 나의 입시 실패 뒤로, 기대하지 않았던 연년생 남동생의 입시결과는 아빠에게 한동안 큰 활력이 된 모양이었다. 그때의 아빠 함박웃음이란. 평소에 만나지도 않는 지인에게 갑자기 안부전화를 돌리고.
"나는 뭐 요즘 별일 없지요, 참 우리 머슴아는 요번에 OO대 들어갔십니더."
이 한마디 하려고.
언젠가 아빠가 술 한잔 걸치고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부모는 사람들 만나면 할 얘기가 자식 자랑 밖에 없더라. 자랑할 게 없으면? 남 자식 자랑 들어주고 어? 꿀 먹은 벙어리 노릇 하다 오는 기라. 무슨 말을 하고 오겠노."
사춘기 때 나는 친한 친구에게 아빠가 술 드신다고, 엄마 아빠 어젯밤에 싸웠다고 부모 험담을 하며 친구와 친밀해졌다고 믿었지만, 부모는 친구에게 자식 험담 대신, 그냥 말이 없어졌다. 자식이 잘하면 부모가 잘 키운 덕, 자식이 못 하면 부모가 못 키운 탓이라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