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혐오자였던 내가 갑자기 해외 담당 부서에 입사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영어를 담당하셨다.
유독 영어 성적이 다른 성적 대비 나빴던 나는 매번 담임선생님께 불려 가 잔소리를 듣곤 했다.
"왜 영어가 하기 싫니? 이 책을 공부해보는 건 어떠니? 너는 영어만 좀 하면 훨씬 성적이 좋아질 거야."
진로상담을 할 때마다 선생님은 천일문(당시 영어 기초 교과서처럼 불리던 책이었다.) 책을 쥐어주시기까지 하며, 제발 영어공부 좀 해보자고 그렇게 나를 타이르곤 했었다.
당시 사춘기였던 나는 왜 이과반 담당 선생님이 영어냐며, 나는 대학교를 영어로 가지 않을 거라며(?), 다들 사대주의에 빠졌다 나중에는 기술이 발달해서 영어 따윈 안 해도 되는 시대가 올 건데 왜 시간을 허비하냐 라는 온갖 불만을 토로하며 끝까지 그 천자문 책을 펴지 않았다.
대학교 때 까지도 나는 소위 말하는 영어 혐오자였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과학 문제를 푸는 것은 명쾌하고 재밌었고, 전공 수업도, 교양 수업도 다 나름의 의미가 있고 파고드는 재미가 있었는데, 영어는 좀처럼 내가 쓸 일도 없고, 다른 나라 언어를 왜 배워야 되는지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사실 공대생은 영어를 거의 안쓸 줄 알았다. 평생.
선배들 중에서도 영어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거나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하는 선배들은 아무도 없었다.
원하는 직무도 전부 설계, 품질, 연구소 연구원... 일하면서 영어라곤 프로그래밍 언어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직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학교 때도 교환학생을 가보라는 부모님의 권유도 무시하고(왜 그때 가지 않았을까...),
어쩔 수 없이 취업을 위해 영어 최소 점수가 필요해서 인강을 듣고 공대 취업의 커트라인이라는 800점을 겨우 넘긴 805점을 맞는 순간 영어를 그만뒀었다.
회사 면접에서도 영어를 잘하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잘 못한다고 대답을 했다.
근데 이 솔직한 대답이 겸손해 보였나 보다.
회사에 들어와 보니 나는 무슨 글로벌 사업본부에 해외지원 파트라는 곳에 배정되어 있었다.
아니. 회사가 어떻게 이렇게 인력배치를... 못하는지?
대체 내가 면접 때 말한 건 어디로 들은 것인지...?
내가 맡은 업무는 무려 해외 고객 기술 문의, 해외 고객 제품 교육, 해외 고객 공장 투어, 공장심사 지원, 기술미팅, 기술세미나 진행.... 해외가 붙지 않는 업무가 하나도 없었다.
본 부서에 들어온 다음날부터 영어로 갖은 제품에 대한 불만사항이 섞인 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아아... 영어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이들은 전부 우리 제품에 화나서 나에게 연락을 한 존재들이다...
근데 나는 심지어 아직 우리 제품이 뭔지도 잘 모른다.
아아... 망했다....
공대는 영어 안 써도 된다고 했잖아...(누가?)
그렇게 나는 영어를 아주 많이 쓰는 공대 졸업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