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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매기 Aug 30. 2024

고용주의 싸가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정신건강에는 매우 좋은 긍정적인 변화가 하나 생겼다. 바로 나쁜 일이 생겼을 때 확 짜증이 나다가도 어느 순간 '이거 브런치에 적어야지.'라는 잡생각이 떠오르면서 불쾌했던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단조롭다 못해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매주 2개의 글을 꾸준히 연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씩 내 머릿속에 담긴 개인적인 의견들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바로 오늘도 나의 고요한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약 1년의 기간 동안 미운 4살의 아이가 고집불통 5살이 될 때까지 기관에 보내지 않고 365일 모두 내 손으로 직접 케어했다. 내 인생 최고의 고뇌와 인내의 시간을 거치며 아이와 함께 나 자신도 많이 성장했는데 드디어 그 애증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정작 유치원에 다닐 아이는 태평한데 휘몰아치는 준비물에 엄마는 정신이 없다. '이제 제발 좀 떨어졌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상하게 막상 떼어놓으려니 아직도 마음이 심란하다.


혼자 있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감은 어디 가고 그저 갑자기 찾아온 자유가 낯설고 어리둥절하다. 뭐라도 해야 되는데 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몇 달 전 구직신청을 해둔 사이트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구인공고를 문자로 보내왔다.


"xx점 다이소 파트타임 가능/오전 10시-오후 4시/60세 미만 지원가능"


'어라? 우리 집에서 엎어지면 코앞에 있는 내가 자주 가는 그 다이소에서 내가 딱 원하는 시간대에 파트타임으로 사람을 뽑는다니 이건 운명이야!'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바로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하면 어쩌지? 유치원 적응기간도 있고 하니까 조금만 늦쳐달라고 해도 되겠지. 아니 그리고 설마, 오늘 올라온 공고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연락이 바로 오겠어?'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고 오후 5시에 제출한 이력서를 보고 1시간 뒤에 바로 연락이 왔다. 이제 막 저녁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어 한입 가득 밥을 욱여넣는데 하필이면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아씨... 꼭 밥 먹을 때만 전화가 온다니까.'

당연히 남편이겠거니 생각한 전화에 낯선 번호가 뜨자 씹지도 않고 급하게 음식을 삼키고는 후다닥 작은방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갈매기씨 맞죠?"

"네네!"

"이력서 제출한 거 맞고요?"

"네네, 맞아요."

"그런데 왜 오전 파트타임만 가능해요?"


엥? 다짜고짜 내가 지원한 시간대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질문에 황당했다.

파트타임 지원하는 게 싫으면 그냥 풀타임만 가능하다고 써놓던지... 말투에서부터 불만이 가득하다.


"아... 제가 아이가 있어서 현재는 그 시간대만 가능해서요."

"... (알빠 아니라는 듯) 그럼 내일 면접 보러 와봐요."

"아네. 그럼 내일 아무 때나 가면 될까요?"

아니 내일 11시까지 와요!


하... 전화 예절 어디 갔나요?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한국말인데 '내일 11시에 면접 보러 올 수 있어요?'라고 상대방의 의사를 묻는 것이 기본 예의이거늘 나이도 꽤나 들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 말끝마다 명령조다.


말끝에 '요'자만 붙인다고 다 존댓말이 아니라는 걸 나는 오늘 확실히 알았다.


뜬금없는 전화 공격에 할 말을 잃은 나는 순간 머릿속에 버퍼링이 걸리면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버벅거리고 말았다.


"11시요? 어........................... "

"왜요? 안 돼요?"


짧은 순간이지만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는 다음 주에 유치원에 가고 지금은 집에서 데리고 있다. 오후 시간에 아이가 잠깐 학원에 가는 시간에 짬이 있는데 그때 가도 괜찮으시냐 아니면 다른데 맡기고 11시에 가도 괜찮다 등등할 말은 많았지만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배려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나의 사정이 뭐가 중요하겠나 싶었다. 저런 사람에게 나 같은 인재는 너무 아까웠다. 무식하고 무례한 사람에게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생각해 볼게요!"

나는 그렇게 초스피드 간단 전화면접을 마치고 구직을 포기했다. 재수 없는 고용주의 말투에 밥맛이 떨어지고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순간 브런치에 올릴 에피소드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금세 기분이 풀어졌다.


'그래! 면접 보러 가서 알았으면 더 열받을 뻔했는데 기름값 아꼈지 머. 전화로 끝낸 게 얼마나 다행이야.'


예절과 겸손은 지능이 높은 사람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인간의 진화한 능력이라고 했다. 어찌 운이 좋아서 멍청한 인간이 사장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똥구녕으로 쳐 잡쉈냐는 막말을 듣지 않으려면 아무리 당신이 돈을 주고 부려먹을 직원을 구하더라도 예의를 지키기 바란다.


직원은 하인이 아니고 고용주는 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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