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동네친구, 친구엄마라는 말 대신 육아동지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단어의 뜻은 동네에서 오며 가며 아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게 되는 사이, 마음을 터놓고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도로 그냥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친한 엄마일 테다.
동지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는 목적이나 뜻이 서로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출산과 동시에 엄마들은 육아라는 공통된 관심사와 비슷한 생활패턴 때문에 처음 만난 사이라도 쉽게 말이 통하고, 서로 금세 친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아이의 올바른 성장이라는 공통 과제를 품은 엄마들은 어쩌면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우리 모두가 육아를 하면서 같은 목표와 뜻을 가지고 서로가 당연히 납득할 정도에 상통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 나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오는 맘충들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같은 엄마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상한 여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동지를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당신에게 믿고 의지할만한 동지가 있다면 그야말로 럭키!라고 말해주고 싶다.
만약 '왜 나는 육아동지가 없지?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비슷한 처지에 엄마들과 사귀고 싶은데 도대체 어떤 식으로 친해지는 거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더 이상 시간 낭비 하지 말자.
나 말고 다른 엄마들은 모두 친하고 즐거워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혼자가 싫어서 함께 하지만 결국 본인 스스로 단단해지지 못하면 함께 있어도 늘 불안한 법이다.
명심하자! 진정한 육아동지는 바로 당신 옆에 있는 배우자, 가족 그리고 그 외 꾸준히 관계를 이어온 사람들뿐이다. 매일 마주치는 동네 엄마들, 유치원 학부모들은 당시에는 엄청난 유대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부질없는 관계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피하거나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친해질 이유도 없다. 가벼운 인사 정도 나누는 사이면 충분하다.
상대방의 조건, 배경, 환경보다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던 순수했던 학창 시절! 그때도 만나지 못한 당신의 소울메이트를 아줌마가 된 지금에 와서야 좁아터진 주변 동네에서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아이가 24개월 즈음되었을 때 일이다. 어린이집 하원시간이 되면 매일 유모차를 끌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동선으로 아파트 주변을 다니다 보면 매일 같은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고, 원하던 원치 않던 서로 안면을 트게 된다. 나는 그렇게 점점 동네 새댁으로 얼굴을 알리면서 여기저기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래봤자 아는 사람들 이라고는 이모님, 할머니들이 전부였던 나는 슬슬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기 엄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대화를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선뜻 먼저 다가가기에는 용기도 동기도 항상 부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만치 멀리서부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보내는 여자가 있었다. 인상이 어찌나 좋은지 그 여자의 반가운 인사는 나를 무장해제 시키기 충분했다. 우리 딸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같은 어린이집 가방을 들고 있던 학부모를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그 여자와 마주친 첫날, 뭔가에 홀린 듯이 자연스럽게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같은 아파트 주민에 같은 어린이집을 보내는 엄마라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갔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이 드는 건 30대 후반 인생 짬밥에서 나오는 나름의 촉 같은 것이었나 보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가끔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같은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가거나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면서 금방 가까워졌다.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었고, 다른 지역에서 이사를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정보도 없다고 했다. 나는 그런 동생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항상 공유했다.
아이와 갈만한 좋은 놀이시설이 있으면 뚜벅이 동생을 대신해서 운전기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돼서 동생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날은 동생네 집으로 처음 놀러 간 날이다. 기쁜 마음으로 두 손 가득 선물을 싸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집구경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초인종이 울린다.
'대낮에 남편이 왔을 리는 없고... 나를 초대해 놓고 또 누구를 불렀나?'
의아했지만, 그냥 넋 놓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낯선 여자 둘이서 세상 어설픈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너무 화장실이 급해서 왔어. 빨리 문 좀 열어 줄래?"
내가 집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 마냥 한 여자는 나를 보지도 않고 화장실로 직행.
나머지 한 여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관찰한다. 그러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석이다.
나는 매우 불쾌했다. '손님으로 초대해 놓고 다른 사람을 불러? 내가 우습나?'
하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무례함이 아니라 굉장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내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 여자... 왠지 낯설지가 않다.
'이 여자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디서 봤더라?' 내가 스스로 떠올리기도 전에 그 여자가 알려주듯 내 앞에 성경책을 펼쳐 보이면서 설교를 시작한다.
"하나님 어머님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오 마이갓! 이 여자 한 달 전 즈음에 놀이터에서 양복 입은 남자들과 함께 이상한 문구가 적힌 전단지를 나눠주며 포교활동을 하던 그 여자다. 눈 주위가 푹 들어가고 정말 특이하게 생긴 눈매 때문에 잊어버릴 수 없는 바로 그 얼굴!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친다.
그렇다. 지금까지 동생이 나에게 접근했던 것도, 이 여자들이 오늘 이 집에 쳐들어온 것도, 그동안 본인이 다니고 있다는 교회를 끊임없이 언급해 왔던 것도 다 계획된 것이었다.
나는 그 여자들의 설교를 꼬박 1시간을 넘게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접근해 놓고 참 어설프고거지 같은 발연기 때문에 모든 게 들통이 나는구나.'
뜬금없이 남의 집에 와서 남의 집에 있는 손님에게 다짜고짜 성경책을 들이밀면서,
"교회는 원래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에 가야 돼요. 여기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어요. 저희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따르고 있어요. 우리 같이 천국가요."라는개소리를 하면 어느 누가 설득당하겠는가?
하... 황당했지만 나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무사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밀폐된 공간에서 나를 어찌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집을 나온 뒤에 이 동생년을 어떻게 족칠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긴 고민 끝에 그냥 연락을 끊고 조용히 보내주기로 했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다른 엄마들과 친분을 쌓지 않는다. 또다시 이상한 사람들과 엮일까 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지 모르니까? 아니다.
'사이비 종교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그 사람들과 친해질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외로웠다. 그런 나의 마음이 이용당한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또다시 나의 진심이 하찮게 여겨질까 두렵기 때문에필요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 엄마들과의 관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단단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게 되어있다. 나를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혼자서도 당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