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 에세이]타인의 노고에 기댄 하루

by 시골쥐

관계에 지쳐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질릴 지경이 되면, 타인에게 감사한 일을 떠올려 보라던 사람이 있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기대감이 바닥을 칠 때마다 칫솔질하듯 기억을 긁어내며 하루를 복기해 본다.

대체로 고마운 일이,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은 출근길에 만난 뺀질이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벌써 그저께 보냈어야 할 자료를 아직 받지 못했다. 어제 종일 연락 두절이더니, 오늘 아침 회사 앞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받고 있길래 잡아챘다.

오전 중으로 보내달라 하니 내일까지 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직 준비조차 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내일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거라는 복선이었다.

자기 일은 당장 지구 멸망 버튼이 눌릴 것처럼 재촉하면서, 남의 일에는 매사 만만디(慢慢的)다. 급하다는 사정에 야근까지 해가며 맞춰준 게 부지기수인데, 정작 나는 기한을 준 요청도 한 번 제날짜에 받아보지 못했다.

기필코 똑같이 복수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러다 문득, 대화를 나눈 로비가 생각났다.

비가 어지간히 내려 쉽지 않았을 텐데 미끄러움과 얼룩이 없었다. 구둣발로도 살금 거리지 않고 편안히 걸을 만큼 깨끗했다. 누군가 새벽부터 부지런히 닦으셨나 보다.


점심 메뉴로 나온 상추쌈을 많이 먹어 졸음이 쏟아진다던 동료가 떠올랐다. 지난 며칠 비가 왔는데, 어떻게 상추가 그리 싱싱했을까. 방법은 모르지만 그것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관여한 모든 분이 애쓴 덕임은 분명하다.

탈 없는 하루, 계획과 닮은 하루, 전기와 수도 같은 생활 인프라를 불편함 없이 누린 하루, 모두 내가 이름도 모르는 타인 덕분이다.

고군분투하여 살아낸 것 같은 하루는, 실은 여럿의 수고로움에 기대어 만들어진다. 그 노고가 포개고 포개져 서로의 삶을 지탱한다.


건축물이 보이지 않는 것 ‒모래와 자갈, 시멘트 또 그것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 등‒에 의해 지탱되듯, 삶 또한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너무 익숙해 눈에 띄지 않거나 일일이 다 알지 못할 만큼 평범한 하루의 조각들이다.


그러고 보면 나를 위해 애쓰지 않는 건 내가 잘 아는 몇몇뿐이다.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수고가 내 삶을 떠받친다.

다시 생각하니, 참 고마울 사람이 많은 매일이다.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넘치고 흐를 만큼.


관계에 지친 어른을 위한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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