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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쥐 Jan 19. 2024

신뢰도와 일무더기의 정비례 공식

직장에서의 신뢰는 득일까, 독일까

"수고 좀 해줘.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래."

은밀한 호출에 불려 갔다가 예상치 못한 일거리를 받아왔다. 마감 기한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기획안이다. 오늘부터 밤을 새도 끝낼 수 있을지 확답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후배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뺀질거리기로 유명한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팀장의 결투신청이었다. 결과는 팀장의 참패였다. 천성은 바꿀 수 없는 것이었고, 후배 녀석을 통제하기에 팀장은 너무 여렸다. "잘 되고 있니?", "네. 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의미 없는 문답으로 한 달을 허비하다가 이 사달이 났다.

간곡한 부탁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고 딱히 거절할 만한 핑계도 없어서 기획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공간을 채우느라 머리에서 김이 났다.


종종 이런 업무를 맡게 된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거나, 중요하거나, 복잡한 일들. 과장이라는 직급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뢰받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책임감 있고 대충 하지 않는 성격은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항상 평균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었고, 실력을 증명하게 되어 신뢰를 쌓아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뢰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심지어 더 중요하고 무거운 일이 주어졌다. 그걸 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다 보니 축난 몸과 피폐해진 마음, 번아웃된 머리만 남게 되었다. 믿음직한 직원이라는 추상적인 평가 말고는 딱히 돌아오는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너무 지치고 공허하고 허무해서 친한 선배와 소주를 마셨다. 한참 동안 푸념을 늘어놓았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혀버린 것 같아서 답답했다. 대충 하기에는 마음이 불편하고, 하던 대로 하자니 소진되는 느낌. 이집저집 불려 다니며 밭을 갈았던 농번기 황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한참을 듣고만 있던 선배가 입을 열었다.

"직장에서 신뢰받는 사람이란 건 말이야, 어쩌면 성능 좋은 AI스피커 같은 것일지 몰라. '카카오! TV 틀어줘' 같은 거. 그러니까 지시하는 사람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 그런데 우리는 AI스피커가 없어도 TV를 틀 수 있고, 채널을 돌릴 수 있고, 보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냉정하게 생각해라. 네가 정말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남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입이 쓰겁다. 식어버린 소주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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