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카이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가람 Aug 01. 2018

나의 아버지

아카이빙





아버지는 부산의 여러 백화점과 마트에 과일을 납품하는 청과물 도매업자였다.


사업규모가 작지는 않아서, 돌아보면 나는 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참 자주 일을 다니셨다. 그러니까 내가 10~15살 정도 사이 였을때.


보통 담당자 미팅을 하는 동안은 나를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4~5곡이 지나면 돌아오시곤 했다.


시간이 곡수로 기억나는 이유는 일을 보시는 동안 나는 차 안에 꽂혀있는 아버지의 테잎들을 들었기 때문에.


보통 테잎의 A사이드를 다 들을 때쯤이면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다음 일터로 가 B사이드를 다 들을 때쯤이면 또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지금 생각해봐도 진짜 끝내주는 앨범들만 차에 있었다.


딥퍼플, 비틀즈, 퀸, 이글스, 레드제플린 등등.. 나는 저 시대의 밴드 음악을 들으면 


어린 시절의 카시트의 촉감과 방향제향


아직 늙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과 기어 위에 올려진 두껍고 커다란 손등의 질감까지 


여전히 손에 닿을 듯 촉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두꺼운 손위에 내 작은 손을 올려두고 기어를 변속할 때마다 내가 운전하는 척 장난을 치던 기억도. 




보통 오전 미팅이 끝나면 점심을 먹었는데 자주 서울깍두기라는 설렁탕집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메뉴는 거의 수육 하나와 국밥 두 개, 나는 아직도 그렇지만 어릴 때는 유난히 더 뜨거운걸 잘 못 먹었다. 


뜨겁고 맵고 이런 음식에 참 약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식사를 다하시는 동안 늘 반도 못 먹었고, 


그럴 때면 아버지는 별 말없이 조용히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내 밥그릇만 보며 기다려 주셨는데


나는 어린 마음에 그 시간이 그렇게 무서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딱히 재촉을 하거나 혼을 내신 것도 아닌데.


계속 내 그릇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표정이 왠지 화난 거 같아서 그랬을까? 


그 시절의 아버지는 워낙 호랑이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아니면 아버지가 워낙 급하게 부지런히 살던 사람이라 그랬을까? 


그래서 그 템포에 나도 맞춰야 한다는 생각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면 나를 집에 내려다 주시고는 나머지 일을 보러 가셨고 


나는 그 뒤엔 뭐했나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대충 20년은 된 이야기니까.




어른이 되고 서울에서 혼자 일을 하며 지내는 동안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나면 


서울깍두기에 가서 혼자 설렁탕을 먹었다.


어릴 때 추억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그냥 거기서 밥을 먹고 있으면 


혼자 먹어도 혼자 먹는 기분이 안 들어서 좋았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난 16년도 겨울 아버지의 대장암 수술 뒤 항암 기간 동안 


아버지를 돌봐드리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 기간 동안 체력적으로 버티기 위해 그리고 수술 이후 빠진 체중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서 아버지는 밥을 최대한 잘 드셔야 했는데


그때 설렁탕이나 돼지국밥을 몇 번 아버지와 함께 먹은 적이 있다. 그걸 주로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하루는 해운대 백병원에서 항암을 끝내고 같이 설렁탕을 먹은 날이 있었는데 


그 날 처음으로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리 밥을 먹었다.


왠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같이 내려올 것들이 너무 가득한 기분이라 


국물만 남은 빈그릇의 바닥만 달그락달그락 긁었다. 


더 이상 퍼먹을 것 없는 그릇을 한참 퍼먹으며 아버지를 살펴봤다.


빡빡 민 머리, 의료사고 때 응급조치로 넣은 산소호흡기 때문에 죄다 망가지고 뒤틀린 치아, 


너무 말라버린 몸, 힘없는 숟가락질, 수술 때문에 달게 된 아랫배의 배변주머니까지.


그냥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났을 뿐인데 아버지는 왜 이렇게 많은걸 뺏기셨나 생각하고 있는데


힘없는 숟가락이 내 빈그릇에 한가득 하얀 밥을 퍼 넣어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어릴 때 내 그릇을 한참 보고 계셨나 알듯했다.


여전히 서로의 그릇을 보며 밥을 먹었을 뿐이지만 나는 그때 몰랐던걸 하나 더 알았고 그게 참 슬펐다.


그래도 그때보다 아버지의 사랑이 더 보호장비 없이 투명하게 다가와 마음이 그저 슬프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많은걸 잃은 건 슬펐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가득 남아있으니 덜 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집에 와서는 아버지가 준 쌀알보다도 많이 울었다



요즘 아버지는 의료사고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오늘은 전화로 어릴 적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나의 아버지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수백 개도 넘게 쓸 수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생각나 오늘 기록해 둔다.






-




아버지, 나이를 먹으며 보니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폭로된 비밀입니다.


아버지는 따듯한 비밀을 많이 가지고 계셨고 덕분에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여기저기서 생각이 나서 


괜히 웃고 그리워하고 가끔 눈물이 나고 그럽니다.


그래도 그 비밀들 덕분에 저도 분명히 나중에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고 조금은 투명해지신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 


사람 속이 훤히 보인다는 게 가끔은 참 눈물 나게 아름답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얼마 전에 친구가 죽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