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파편들
*브런치 X 빅이슈 매거진 참여를 위해 재업로드하는 글입니다.
아마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연애한 여자 일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첫사랑이라고 부르려면
후에 그 사람을 이야기할 때
아 그때는 내가 진짜 그 사람이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라고 말할 정도는 돼야 하겠지.
어쨌든 이제는 생각하면 애틋하기보단 참 좋았던 기억들이 많아서 흐뭇해지는 사람,
그러니까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사람이
나에게도 있었다.
2년 반 정도 연애를 했고 그래서 기억도 많고 뭐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냥 갑자기 오늘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의류학과로 졸업했지만 사실 첫 전공은 법학과였다.
갑작스럽게 비가 내린 개강 첫날 법대 신입생 환영회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 앞 술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내리니
학생회 사람들이 우산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한 명씩 한 명씩
나도 가슴팍에 신입생답게 네임카드를 달고 있었고
내리자 말자 어떤 여자가 스윽 다가와서 우산을 씌워줬는데
그때 느낌이 마치 여자들이 우산 속에서 강동원이 나오는 걸 본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쨌든 아 대학교 잘 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그전까지는 예비대 이런 걸 안 가서 뻘쭘한 기분에 모든 게 싫었는데.
각자의 야망으로 탐색전이 활발하던 그 술자리 내내 알아낸 정보는
같은 신입생이고 재수한 나보다는 한 살어리고 학생회를 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우산 아래보다 술집 불빛 아래에서 더 예쁘다 정도
술자리가 끝 나갈 때쯤 다들 집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같이 집으로 가자며
하나둘씩 자기가 사는 곳을 말하길래
속으로 제발 나랑 같은 곳에 살아라고 빌었다.
재수생이던 스무 살 때 대학생 친구들 덕분에 처음 한 왕게임에서
내번호가 불리길 빌었던 간절함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정도로
사실 그 여자가 어디 산다고 말하면
나도 그냥 거기 산다고 말하고 싶었다.
결국 알고 보니 그 여자도 나랑 같은 동네 심지어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사는 이웃주민.
그 덕에 우리 둘은 같이 집에 가게 되었고.
어색하게 집 앞까지 같이 가다가
네가 좋아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니 처음 보자마자 좋아! 그렇게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러니까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해서
그..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갈래?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이야기를 좀 더 하고
같이 등하교를 하고 한 달 뒤쯤에는 손도 잡았고
그보다 좀 더 지나서는 사실 나는 아이스크림 안 좋아한다는 것도 말해주고
교양이었던 영화 수업 덕분에 걔네 집에서 둘이
친절한 금자씨도 보고, 금자씨 얼굴보다는 서로 얼굴을 더 많이 더 가까이서 보고
그렇게 쉴 틈 없이 새로운 것 새로운 곳 새로운 감정과 기분들을 느끼면서
둘이 한 컵에 들어가서 사랑의 막대기가 서로를 휘젓는 기분을 느끼면서
두 명의 삶이 섞여가는걸 느끼면서 살다가
그냥 어느 날 헤어졌다. 한 2년 반 정도만에
뭐 왜 그랬는지 같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들 다 때 놓고
생각해보면 그때는 재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순재식 그러니까 라이나생명 OK 실버보험식 사랑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가 몇 년 뒤 다시 만나서도
참 좋은 기억들만 남았다고 우리 서로 운이 좋았다고
추억할 수 있는 것 같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이 첫사랑을 못 잊고 품고 산다고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
잊지는 못하지만 품지는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열심히 만들어준 좋은 기억들에
감사할 뿐 다시 서로가 그런 기억들을 만들어 나갈 수가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그걸 어떻게 잘 아는지는
시간이 많이 지난 뒤 다시 만나보면 알 수 있다.
둘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냥 느낄 수가 있다.
그저 서로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어주는 관계가 된다.
나에게 첫사랑이라는 건
어떤 한 사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다수의 기억들을 의미한다.
첫사랑은 어떤 한 사람과 수많은 기억의 순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따듯하게 숨 쉬고 있다.
과거를 생각할 때
내 삶이 너무 차갑지 않게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해운대구 재송동이 센텀시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전에
가난한 언덕배기 달동네였을 때
그러니까 마치 바닷가 바위 따개비마냥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 비슷했을 때
그러니까 마치 바닷가 바위 따개비마냥 세상 파도에 후들겨 맞으며 꼼작 못하고 살고 있었을 때
집 한 채 한 채마다 각자의 절망 하나씩 챙겨두던 그때
어두운 밤 동네 가장 높은 아파트 옥상에 서로 올라 이 따개비촌을 바라보며
불 꺼진 마을 속 야속하게 빛나는 무수히 많은 십자가의 빛들을 욕하며
절망이 많은 곳에 희망 팔러 온 그 십자가들의 상술을 욕하며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하고 힘이든지
앞으로 어떻게 잘 헤쳐나가야 할지를
대학교를 졸업하고 뭘 할지
뭘 만들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매일 고민하고 서로를 다독여주며 자주 듣던 노래.
오랜만에 들으니 참 기분이,
근 십 년간 내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떻게 그대로 변하지 않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마음으로 다가온다.
역시 좋은 음악에는 부력이 있고
반드시 무언가를 떠오르게 한다.
노래 하나 덕에 이렇게 길게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