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 이렇게 다 컸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평범한 계획.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성격 좋고 바르게 사는 사람을 만나 연애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별 탈 없이 기르고…
퇴근길에는 친구와 맛있는 안주에 술을 마시며 옛 추억을 얘기하고, 여름이면 가족들과 외국에 여행을 가는 삶.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고 서점에 들러 신간을 사서 돌아오는 삶.
봄바람이 슬며시 부는 퇴근길 저녁에 여고 친구 생각이 났다. 지방에서 상경한 내게 서울에 사는 고향 친구는 손에 꼽는데, 그중에서도 연락을 할 수 있는 친구가 남아있다는 게 놀랍다. Y는 여고 동창이자 대학 동창이라는 진한 인연이다. 게다가 우리는 생일까지 같다. 매년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페이스북과 인스타를 통해 인연을 이어왔다. 매번 연락만 이어가다 꼭 만나고 싶었다. 직접 청첩장을 주고 그동안 못 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용기 내 만나자고 카톡을 보냈다. 사실 Y와 내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무용 전공을 했던 그녀와 평범한 문과생이던 나의 길이 달랐던 배경도 있거니와 서로의 지향점도 달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깝지만 먼 Y는 내게 그런 친구였다.
Y는 대학 졸업 후, 무용의 길을 뒤로 하고 영종도에 있는 기업에 취업했다. 거의 6년 동안 영종도에서 그녀의 20대 중후반을 보냈다. 평범한 서울 살이도 힘든데,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일반 중소 기업에 다니게 된 무용 전공 사회 초년생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Y는 허리까지 오는 새까맣고 윤기 나는 긴 머리를 가졌는데, 얼굴이 조막만 한 데다 눈썹이 진하다. 그리고 피부가 까무잡잡하다. 무용 전공을 포기한 뒤로는 운동도 식단도 전혀 하지 않아 살이 많이 쪘다지만, 그 태는 여전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중소기업의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조리 다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청담에 살고 있는 Y. 사실 난 그녀가 집안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무용을 전공한다는 게 집안의 조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 무용을 그만두었더라도 사는 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거니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무용을 그만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에 모든 걸 걸고 열심히 한 것도 집안 도움 없이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녀에 대해 단정하고 오해해서 미안했다.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수업시간에 매일 뒷자리에 앉아 엎드려 자던 Y. 스물 대학교 바로 앞에 있던 그녀의 자취방에서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주던 그녀가 이제 치열한 삶을 사는 서른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고 밑바닥에서 부터 배운 경험들을 바탕으로 혼자 조그만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주변에 무용과 친구들이 많아 더 비교가 많이 되었을 텐데, 회사를 다니는 동안 명품 가방 하나 사지 않고 모은 돈으로 사업을 한다는 Y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학교 다닐 땐 그렇게 자더니 지금은 밤새 코딩 공부를 하고 있고 챗GPT는 그녀의 스승이자 친구이나 파트너라며 쌍따봉을 들었다.
서울에서 상경해 12년을 혼자 살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떤 사람이 밤길에 해코지를 하지 않을지, 전세 보증금을 못 돌려받지는 않을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많다. 전세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중개인과 집주인에게 특약을 넣겠다고 바락바락 주장하는 Y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 번은 돈이 많다는 집주인이 사람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계약이 끝나고 밥은 먹었냐며 자기 차에 태우고선 좋은 식당에 데려가 한우를 사줬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는 Y에겐 그간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의 개인사를 더 묻지는 않았다. Y는 자기가 지금 더 대단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내가 자기 친구라서 자랑스럽다고 한다. 사실 친한 친구 한 명도 없다고 씩씩하게 말하는 데 그럼 대체 누구한테 기대냐고 나무라고 말았다. 그럼에도 내게 너는 어렸을 때부터 성실하게 공부하고 대학생 때는 혼자 프랑스까지 가서 씩씩하게 공부하고 또 지금은 회사에서도 너무 잘하고 있는 걸 지켜보면서 항상 응원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착한 마음에 어찌할 말이 없었다. 나를 이토록 지켜봐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걸 몰랐다.
지금 나는 정말 평범한 삶을 살고 꿈꾸는 평범한 사람인데, Y같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대단한 친구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이토록 씩씩하고 착한 그녀가 내 친구라서 고맙고 제발 이 친구가 잘됐으면 좋겠다. 열일곱 스물 서른하나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더 지켜보고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