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소모하지 않는 법
새벽 여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핸드폰을 열어본다. 다섯 시부터 정신은 긴장해서 일어나려 하고, 몸은 더 자고 싶다. 기어코 알람이 울리고, 오 분만 더 뭉그적 대다 욕실로 향한다. 어제저녁에 먹고 잔 요거트가 배를 요란하게 울린다. 심상치 않다. 출근 준비를 하는 중에도 화장실을 다섯 번이나 갔다. 신랑은 오늘 회사에 일찍 가야 한다고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나가자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먼저 잡고 신랑이 신발을 신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화장실을 또 가야 할지 고민한다. 결국 신랑을 먼저 내보내고 또 화장실에 간다. 이 정도 배탈로 회사에 안 갈 순 없지라며 괄약근을 잡고 문 밖을 나선다.
청초한 봄날의 싱그러운 바람이 불었다. 아침 공기라 더 상쾌하고 나무들이 이다지도 푸르렀나. 아파트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신랑에게 달려가면서 하루 연차 내고 쉬고 싶다 생각했다. 배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해서 꾀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직장인은 배가 아파도 출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신랑 차에 타고 유턴을 돌자마자 또다시 신호가 왔다. 이제 포기해야겠다. 바쁜 출근길에도 신랑은 내가 딱해서 다시 유턴을 해서 집 앞에 내려줬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배는 아프지만 왠지 웃음이 났다.
팀장님께 연락해 장염인 것 같다고 하루 쉬겠다고 알리고, 침대에 누웠다. 탈수 증세가 있었는지 온통 진이 빠져 눈을 떠보니 아침 열 시 반이었다. 엄마에게 장염인 것 같다고 알렸더니 아빠에게 전화 두 통과 병원을 가라는 카톡이 와있었다. 흐뭇했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 아빠의 걱정을 받는 걸 좋아한다. 여전히 부모님의 애정이 고픈 서른 살 둘째 딸이다.
인생의 봄날이 있다. 그 봄날이 오늘이다. 나의 예민한 몸은 내가 소모되는 걸 참지 못하고 병을 내버린다. 고맙다. 배탈이 심한 정도는 아니라 집에서 쉬어주면 나을 일이었다. 지난주 팀장님과 둘이서 일본 출장에 다녀오고 5시간도 채 못 자고 출근을 했었고, 주말엔 어머님들을 모시고 한복 투어를 다녀왔다. 긴장이 풀렸다가 월요일 출근 뒤에 찾아온 피로 때문인지 배탈과 몸살이 찾아왔다. 덕분에 집에서 하루 푹 쉬면서 밀린 집안일을 하고, 이불 빨래를 돌렸다.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과 섬유 유연제 냄새가 섞여서 집 안 곳곳이 향기롭다.
아플 때 도넛을 먹는 걸 좋아한다. 배탈에 전혀 도움은 안 되겠지만 기분이 좋아진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걸 아플 때만큼은 꼭 먹고 싶다. 신랑이 내가 좋아하는 맛 도넛으로 가득 채운 박스를 배달해 주고, 나는 또 기뻐한다. 도넛 하나를 봉투에 넣어 커피와 책을 함께 들고 밖을 나선다. 고작 집 앞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여유로움이 직장인에겐 꿀보다 더 달콤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날의 4월.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날씨라 끔뻑 속아 스멀스멀 감기 기운과 함께 하는 나날을 지나 하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싶은 5월이 다가온다.
진짜 다가오는 봄. 내 앞에 통째로 놓여 있는 시간을 끌어안고 싶다.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따듯하고 냄새 좋은 이불속에 숨어 또 그저 흘려보내고 싶다. 도쿄 출장에서 자유 시간이 생겨 재즈바에 갔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재즈 음악의 즐거움 덕분에 갑자기 내 앞에 재즈가 가득해졌다. 봄과 잘 어울리게 마음이 일렁이는 재즈다. 차가운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공존하는 봄날에 재즈가 울린다. 더 이상 나를 소모하지 않고 아껴주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