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퍼, 베뉴 아니고 은색 미니쿠퍼
올해 2월 길이 꽁꽁 언 대장동 언덕에 있는 새 아파트에 이사를 왔다. 결혼을 앞둔 신랑과의 신혼집이었다. 서판교에 있는 대장동은 새로 만들어진 곳이면서 산에 둘러 싸여있어 공기도 주변 환경도 신선하고 산뜻하다. 누군가는 편의시설 부족해서 휑하다고도 하지만, 상쾌한 공기와 아침 새소리, 밤에는 개구리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이곳에 금방 정이 든다.
다만, 주변 지하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15분이 걸리는데, 출퇴근길 판교나 미금역으로 갈 때 30분까지도 걸리기도 한다. 게다가 버스가 시간 맞춰 오지 않을 때는 아침 시작부터 울상이 된다.
회사인 잠실까지 대중교통으로 짧게는 1시간 10분, 오래 걸리면 1시간 30분까지 걸린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버스와 신분당선 그리고 2호선을 갈아타는 일에 하루 에너지를 많이 썼다. 초반에는 출퇴근에 적응하지 못해 운동을 쉬다 보니 체력이 더 나빠졌다. 신랑과 신혼 초에 자주 다투었던 건 서로를 맞춰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출퇴근에 지쳐버린 나의 체력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달 정도 적응하고 나니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직접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마음속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주말에 시간을 내어 남편과 중고 캐스퍼를 먼저 보러 갔다. 1700만 원대의 중고 캐스퍼는 초보 운전에게 적당해 보였다. 그때 당시에 운전연수 딱 한 번 받아 본 나는 운전대를 잡고 후진하는 것조차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은 하필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렸다. 돌이켜보면 2년밖에 타지 않은 아주 깨끗하고 괜찮았던 매물이었는데, 처음이라 선뜻 결심하기 어려웠다. 고민해 보겠다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또 해가 쨍하고 떴다.
집에 돌아와 노트에 열심히 적어가며 검색해 가며 캐스퍼에 대해 알아보았다. 당시에 내가 사려둔 캐스퍼 중고와 신차 가격이 300만 원 정도라 캐스퍼 신차 계약을 걸었다. 5개월 간의 대기를 감수하고. 그리고 운전연수와 영종도까지 렌트해서 운전해 보는 걸로 운전 감각을 길러왔다.
무더운 여름이 지날 쯤엔 차가 나올 줄 알았는데, 출고 대기가 5개월 더 늘어났다는 벼락같은 알림을 받았다. 가성비가 매우 좋은 캐스퍼이기에 더 기다려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내년에나 나올 것 같은 차를 계속 기다리기에 흘러가는 시간이 더 아까웠다. 그래서 비슷한 종류의 소형 suv로 베뉴를 골랐다. 한 달 정도 기다리면 출고가 가능하다 하여 원래 예산보다 400만 원 정도 더 들여서 베뉴를 계약했다. 그리고 또 기다렸다.
이번 달에는 정말 차가 나올 줄 알았는데, 현대자동차 파업 소식과 함께 베뉴도 출고가 밀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베뉴를 고르기 전에 집 근처 미니 전시장에서 빨간 미니쿠퍼를 시승을 하고 나서 이 차구나 싶어서 계약까지 했었다. 그렇지만, 4천만 원이라는 가격에서 내가 가진 예산이 허락지 못해 취소를 하고 베뉴를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심 미니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다시 알아본 게 미니 인증 중고차였다. 엑셀을 켜서 사이트에 올라온 매물들을 꼼꼼히 비교해 보고 3천만 원 이하, 주행거리 10,000km 이하, 작년 연식을 찾아 선택지를 좁혔다. 그래서 만나게 된 2024 미니쿠퍼 3 도어 멜팅 실버. 4,000km 밖에 타지 않은 정말 깨끗한 차였다. 첫 차로 은색 미니를 타게 되다니. 인천 BMW 미니 전시장에서 만난 미니는 확신을 가지고 구매에 성공하게 되었다. 신차보다 천만 원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좋은 차를 탈 수 있게 되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약간의 휠 긁힘 자국과 자그만 천장 얼룩이 있지만 이 정도는 천만 원의 감가라기엔 소소했다.
서른 살, 첫 운전을 함께하게 된 은색 미니가 소중하다. 엄마한테 들어보니 내가 스무 살에 운전면허를 딴 것도 미니 때문이었다고 한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난 언니가 타던 차가 미니 쿠퍼였고 그게 너무 좋아서 나도 나중에 미니를 탈 거라며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었다고 한다.
스무 살 나의 꿈이 서른이 되어 이루어졌다.
차와 함께 넓어질 나의 생활 반경과 경험이 아주 기대가 된다. 올해 운전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얻어 기쁘고 순간순간 결심과 실행에 옮긴 나 자신을 칭찬해 준다.
매 년 출퇴근 주차비(80만 원) 기름값(약 200만 원), 보험료(150만 원) 들겠지만 300만 원 그 이상의 가치를 해주는 내 미니.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많이 따져보길 좋아하는 나는 어떤 부분에서 첫 차를 수입차로 선택한 것을 아쉬워할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출퇴근용으로 타고 있는 미니가 좋고, 운전을 하면서 행복하다. 그래서 요즘 잠을 잘 자고 있다. 출퇴근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무의식적으로도 컸나 보다.
비가 많이 내리는 9월이다. 매일 아침저녁, 차 안에서 노래를 들으며 운전하는 나 자신이 참 좋다. 안전 운전에 늘 신경 쓰고 조심해야 한다며 오늘도 빵! 소리에 놀란 스스로를 달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