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걷기
대학 다닐 때 배낭여행을 갔었다. 17박 18일 다녀왔다. 핵심 5개국 투어로 파리, 런던, 베네치아, 루째른, 뮌헨과 같은 도시에서 이삼 일씩 머무르는 일정이었다. 당시 내 몸의 교감신경의 흥분상태는 최고치를 찍었는데, 새로운 도시를 발로 탐색하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렌터카를 하지도 않았고, 대륙 내 이동하는 기차를 타야 했어서, 시간 내로 이동스케줄을 지키고 그 안에서 시티투어를 했다. 인생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는 경험이었고 보석 같은 추억으로 알알이 박혀있다. 새로운 도시를 걷다 보면 새로운 건물양식도 신기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류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마트의 식재료만 보아도 다른 지형과 기후에서 다른 음식의 재료가 생산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우물 밖 개구리가 되는 순간이다. 당시에는 새벽에 일어나 잠이 깨기 전의 고요한 도시를 음미하기 위해 동네 구석구석 걸었고, 낮에는 활기와 사람들의 열정 어린 에너지를 느꼈다. 저녁에는 가족이나 애인과 차분하게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삶의 사이클은 자연스러웠다. 걸으면 걸을수록 세상은 나에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듯이 다가왔고,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젊은 배낭 여행객들에게 유럽인들은 매우 친절했다.
요즘은 4-5시에 눈이 떠질 때가 있다. 마음은 나가서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런데 동트기 전 여성의 산책에 따라붙은 걱정스러운 마음과 말들이 저절로 내 발걸음을 잡는다. 헬스클럽은 6시에 개장하는 데 그때까지 무언가를 하기도 애매해서 도로 자거나 간단한 스트레칭 후 자기도 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으로 사회연대감(social solidarity)과 안전에 대한 비용을 들 수 있는데,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우발적 흉악범죄들은 시민들의 불안감을 크게 만들고 있다. 헬스장에서 TV에는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에 4800명 주민이 탈출했다는 지구촌 뉴스가 띄워져 있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것은 아니다.
걷기의 운동효과와 명상효과,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긍정적인 결과를 밝히는 연구들이 있다. 나 역시 걷기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걷다 보면 뒤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지나쳐가기 시작했다. 연이어 걷기 운동을 하면 그나마 나은데, 며칠 빼먹다 다시 산책로를 돌면, 걷는 속도도 느려지고, 걸을 수 있는 거리도 줄어든다. 상상해 보라. 임신 5개월은 족히 되어 보이는 배를 안고 힘겹게 걷고 있는 당신 곁으로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허리를 한 여성들이 앞질러 갈 때면 당신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강한 멘털과 정신승리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말했다. “젊을 때는 쉬워.”
비단 체력 만일까. 학생 지도를 하면서 스펀지처럼 세상의 가능성을 흡수하는 젊음이 주는 가능성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부러운 마음도 든다.
어제 15분을 뛰었는데, 오늘은 30분을 뛸 수 있었다. 아파트 지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 지 한 달 정도 된 것 같다. 하다 안 하다 3번 정도 요가도 했다. 여름 내 괴롭게 침대에서 맞이했던 아침보다 확실히 체력이 좋아진 듯하다. 일어났다가도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많이 줄었고, 갑작스럽게 많은 일들이 밀려있다는 압박감에서도 쉽게 벗어나는 듯하다. 나의 하루, 나의 시간에 몰입하자. 하지만, 가끔은 주변도 둘러보자. 혼자 또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