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 있는 삶의 양식은 비만의 최대 적이다. 어쩌다 엉덩이가 이렇게 무거워진 걸까? 신체선열은 망가지고 있으며, 자존감도 무너지고 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모든 것은 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희생을 감내해 주었던 가족들도 있지만, 오가며 툭툭 응원해 주던 연구실의 연구교수님들, 선배님들, 그리고 후배들. 한 강사님은 박사과정생들에게 박사 논문 과정 중의 고통(?)을 등산에 비유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붙잡고 “얼마나 남았나요?”라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힘내세요.”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이들은 깨닫는다. 얼마나 왔는지 조바심 내던 그때 그곳은 제대로 된 등산로도 아닌 겨우 초입이었음을.
연구교수님 중 한 분은 자신이 박사과정을 할 때,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손잡이만 끝까지 놓지 않으면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학위를 취득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나를 도닥여주었다.
어떤 교수님은 자신이 박사 학위를 쓰기 위해 하루에 3~4줄이라도 꼭 쓰고자 다짐했노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여기까지는 꽤나 고무적인 격려의 말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한 박사생은 고층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며,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여 깜짝 놀라 담배를 끄고 들어갔다는 이야기와 다른 한 박사생은 차라리 차가 달려와 자신을 들이받아 죽음을 당한다면 박사 수업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박사 논문을 포기했더라는 풍문과 괴담도 있다. 이야기의 끝은 박사생의 장례식장에 바치는 졸업논문을 ‘영정논문’이라고 카더라라는 통신으로 마무리된다.
나의 박사과정생활도 쉽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연구원 생활과 박사 수업을 함께 병행하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횡단보도 너머에 있는 학교 정문이 너무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학부 5년(복수전공), 석사 5년도 모자라 석박통합 4년 차라니... 학교에서 간혹 내 얼굴을 아는 경비원들은 나에게 친근감의 표시로 “교수님이 되셔서 학교에 또 오셨나 봐요...”라고 띄워주는 말을 하였지만, 그 말은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내 인생사전에 ‘후진’이라는 단어는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내가 뒤돌아 집으로 영원히 가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이 정도 노력에 이것밖에 되지 않으면 ‘포기’도 할 줄 알아야지. ‘미련이 지나친 거야, 소용없는 거야.’라는 자책과 ‘이제 지긋지긋해,’라는 분노의 감정이 뒤섞여 용솟음쳤다. 다시는 이 건널목을 건너고 싶지 않다는 욕구, 나를 깎아내리게 하는 저 문... 문이 원망스러웠다.
그날 나는 멍울진 가슴을 부여안고 그 길이 죽음을 향하는 길인 듯 꾸역꾸역 건넜으나, 죽고자 하면 산다 했던가, 교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 사이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첫째, 내 인생의 귀인을 만났다. JH... 그녀는 따뜻한 햇살 같은 여성이었다. 비록 박사학위를 나보다 먼저 취득하여 H 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교수생활이 썩 만족스럽지 못하여, 의료관리학교실 박사 후 과정생으로 돌아왔다. “제가 선배를 교수님 만들어드릴게요.”라고 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던 그녀는 그만큼 당차고 씩씩했다. 정작 자신은 간호사가 좋다며 다시 임상으로 복귀하였으나, 내가 하는 어떤 고민도 귀찮은 내색 없이 진심으로 상담해 주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더랬다. God Bless JH....
둘째, 학교 길 건너 호텔을 잡았다. 그것도 장기투숙으로, 요 앙큼한 아이디어는 남편의 것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면제해 줄 테니 박사학위 따오세요 “라는 미션이 숨어있었다. 꽤나 그럴듯한 전략으로 낮에는 연구원으로 일을 해야 했고, 논문 분량을 채우려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과 학교를 오가며 소모하는 에너지를 아껴 쓸 수 있었다. 당시에는 24시간 풀가동 체제로 룸에서 자다가도 눈이 떠지면 연구실로 돌아가 논문을 쓰곤 했다.
종심 때 교수님들께서 인준지에 서명을 해주시며 (학교마다 다른지?) 한 분씩 안아주셨는데, 한 심사위원님께서 귀엣말로, ”고생했어, 남편이랑 맛있는 거 먹어. “하시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IRB심사, 계획서 발표, 초심, 중간심사, 종심이라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또 미워했었다. 20명이 합격한 논문자격시험에서 혼자 떨어져 6개월이나 졸업이 늦어졌었고, 지도교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으며, 대학원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나 혼자 실패자라는 걸 알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를 하면서 자학모드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학위를 따고 나니 그까짓 거(?) 일이 년 혹은 이삼 년(나의 경우 3~4년이었으나) 무슨 큰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삶은 흘러가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당시에는 몰입인즉슨,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는 시간의 증가였고, 어떻게든 논문작업을 하다 보니 한 번 앉으면 평균 3~4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는 경험을 했는데 몰입의 즐거움과 날씬한 몸매를 맞교환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