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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네르 Dec 09. 2023

악몽

억울함에 깨다.

여기 오기까지 참 많은 일을 겪었다. 


학생들 기말 점수를 주어야 본격 방학이 시작되기에 어제는 꽤 많은 행정일을 처리했다. 여러 증빙서류에 붙는 과거 사진첩의 영수증을 들춰보다가 뜻하지 않게 업무 차 찍었던 사진 한 장을 보고 이리 밤잠을 설칠 줄은 몰랐다. 

모교의 연구단에서 나는 연구간호사였고, 프로젝트의 주연은 항상 교수님들이셨다. 그들은 펼쳐놓은 상에 앉아 논문과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들이 퇴장하면 간호사와 사회복지사가 조연으로 활약하였다. 물론 연구간호사에게도 역할이 있었으나, 주로 상을 차리고 물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나름 충성스럽게 맡은 바 소임을 다 하였으나, 행사를 하고 있을 때 보고서 작성을 위한 사진을 찍는다던지, 교수님들이 분석할 자료를 클리닝 하는 일을 한다던지 하면 자존감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늘 턱을 주욱 뺀 거북목은 필수요 굽은 등은 덤이었다. 


어렵사리 졸업을 하면서 프로젝트 교수님께서 주시는 강의 기회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벅찼다. 교수업무도 새로 익혀야 하고, 새로운 직장 내 인간관계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데, 방학마다 서울로 오가는 강의 기회란 애매했다. 좋은 취지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하자 하면서도 오가는 시간과 점심값과 커피값을 생각하면, 늦은 시간까지 새끼도 팽개쳐두고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러한 판단을 하기까지 그간 들인 나의 노력이 너무도 아까워 미련을 떨었다.

강의를 준비하는 시간이야 당연한 거겠지만, 학생들의 답안지를 일일이 스캔하여 파일분류하고 미국에 전달하고 정답률이 낮은 학생들의 나머지 공부까지 책임지자면 시간당 강의료는 턱도 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봉사하자고 달려들기에는 잃는 것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연구단 내에 포닥연구교수가 나의 역할을 대리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살짝 발을 빼고 있는 상황인데, 내가 나서서 일에서 빠지겠다고 얘기한 것은 아닌 상황이었다. 


어쨌든 나를 면박주는 프로젝트 책임 교수와 끊임없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던 사회복지사가 호텔 식당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나는 앉지 않아도 되는 그 테이블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3년여를 일하면서 느껴야 했던 이질감. 호텔패키지여행을 좋아하고, 짧은 커트머리보다 긴 웨이브 머리를 좋아하는, 그리고 박사과정에 있으면서도 전공서적은커녕 일반 에세이 소설도 열심히 읽지 않은 무식함이 열등감의 근원으로 자리 잡고 있던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앉아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오기'였다. 꿈에서도 나는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어째서 나의 숨은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지 떼를 부리고 싶었고, 내 편을 드는 대신 사회복지사의 손을 들어준 책임교수를 원망하고 싶었다. 


꿈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핑그르르 돈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오기를 부리는 데에 내 인생의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난방으로 덥혀져있던 방문을 열어젖히니 알싸한 공기가 와락 덮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졸업을 했고 취업을 했으니, 이만하면 성공적이지 않은가.

감사하고 만족하자.

게다가 내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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